(에스겔 16:15-34, 방자한 음녀의 행위)

이스라엘 역사는 변화에서 변질로 비극적인 전환을 맞는다.
아무도 -어미조차- 돌보지 않는
피투성이로 태어난 미천한 아이가
선한 왕에게 발견되어 특별한 보호를 받고
비범한 모습으로 성장한다.
심지어는 왕이 그를 아내로 맞았다.
“극히 곱고 형통”한 “왕후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이러한 변화, 신분상승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화려함을 믿고” 그 “명성을 가지고”
변질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발전과 진보와 개선의 변화가 아니라,
악하고 배은망덕한 변질이었다.
왕후가 왕을 버리고 “행음”을 한 것이다.
가부장적 폭군의 부인이
남편의 포학을 이기지 못하고
다른 이와 눈이 맞았다 해도
왕비의 체신상 이해받거나 용납되기 -사정은 딱해도-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자신에게 무한한 은혜를 베푼
선한 왕을 저버린 음녀라니!
이 여인의 행음은 가관이다.
그는 “모든 자와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했고,
그의 새 연인들에게 왕에게서 받은 모든 귀한 것들을
-금, 은, 장식품, 수 놓은 옷, 왕후의 화장품인 기름과 향, 왕실의 음식인 고운 밀가루와 기름과 꿀-
갖다 바치고 유혹의 도구로 삼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왕에게서 낳은 자녀들-왕자와 공주들-을
그 새 연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그들의 우상숭배 자리에서 번제물로 태워 죽여 바친 것이다!

이 여인은 남편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새로운 사람을 통해 얻고자 하는
‘진지한’ -그러나 결코 진실하지는 않은- 사랑의 추구가 아니다.
그녀는 “모든 지나가는 자에게 다리를 벌”렸다.
진실한 관계의 사랑이 아니며
오로지 육체의 쾌락을 위한 탐닉이요 발산이다.
얼마나 색욕을 밝히는지
심지어 정결하지 않은 여인들도
그 “더러운 행실을 부끄러워”하였다.

그러고도 그의 “음욕이 차지 아니하”였으며
“아직도 족한 줄을 알지 못하였”다.
탐욕은 중독적이었다.
외부적인 유혹에 할 수 없이 조금씩 넘어간 것이 아니라
자신이 뭇 사람들을 유혹한 의도적인 색탐이었다.
몸을 파는 여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 그 짓을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돈을 주면서 그렇게 했다.
“너는 네 모든 정든 자에게 선물을 주며 값을 주어서
사방에서 와서 너와 행음하게” 했다.
“네가 값을 받지 아니하고 도리어 줌이라”
몸을 판 게 아니라, 드린 것이다.
돈을 줄 테니 제발 나를 가져가달라고 애원한 것이다.

이것이 변질이 아니고 무엇인가?
진보적인 변화는 말할 것도 없고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도 아니었다.
남편-자기를 구해준 선한 왕-을 거부하고
오로지 가증한 죄악의 탐욕을 향해 몸을 사른 방탕이었다.
최악의 변질이었다.
방자함의 극치였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진실이요,
인간의, 그리고 나의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