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3:1-13, 믿음에 대한 위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위로)

‘위로’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 같다.
교회에 위로가 없고 너무 혼내는 것만 있다고 하는 불만이 있고,
반면에 값싼 위로가 넘쳐 진지한 교훈이 희석된다는 우려도 있다.

위로란 무엇인가?
사전의 의미로는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줌”이지만,
본문에서는 격려하다, 고무하다, 용기를 북돋우다는 뜻이 더 적합하다.
“위로”라는 단어와 직접 연결되는 낱말이
“굳건하게 하”다, “흔들리지 않게” 하다, “굳게” 서다인 것을 보면 그렇다.
데살로니가 교인도 바울 자신도 슬픔보다는 환난의 상황에 있다.
슬픔을 달래줄 때가 아니라
환난을 굳건히 견디고 이기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환난의 상황에서 위로는
우선은 고난을 잘 견디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을 포함한다.
무시하는 것은 위로가 아니다.
바울은 환난 중에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디모데를 보내어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위로”하였다.
그들은 환난 중에도 믿음을 지키고 있었다.
바울은 그들이 믿음을 갖도록 ―즉,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전제하여―
몰아붙이려고 디모데를 보내지 않았다.
아니다.
바울은 그 환난을 힘들게 견디고 있는 믿음의 성도들을 격려하기를 원했다.
그것은 ‘잘 한다, 잘 한다’고 비위를 맞추려 입발림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환난 중에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계속 믿음을 지키도록 돕기 위함이다.

위로는 일방적이지 않다.
그것은 주고받는 것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에 대하여 위로를 했지만,
동시에 그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 위로를 받았”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환난 중의 바울을 찾아와 격려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소식, 그들이 환난 중에 믿음에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다는 소식이
바울을 위로했다.
바울은 위로를 하는 자이며, 위로를 받는 자다.
위로가 일방적으로 되기가 얼마나 쉬운가.
그것은 대개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문제가 없는 자와 어려움 속에 있는 자 사이의
서로 다른 위치에서 비롯되는 일방적인 관계로 나타난다.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바울은 자신의 “궁핍과 환난”만을 강조하지 않았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어떤 환난 가운데 있는지 잘 알았다.
둘 다 위로가 필요했고,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다.
즉 서로 위로하는 자가 되었다.

본문에서 위로는 모두 믿음과 관련된다.
물론 일반적인 의미로 위로는
괴로운 마음, 부족한 물질, 아픈 몸에 대한 배려라 할 수 있다.
위로는 모든 영역에 해당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믿음에 대한 위로요, 믿음으로 말미암은 위로다.
몸과 마음과 물질을 배려하는 위로도
궁극적으로 믿음을 북돋우는 것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그것은 상대방의 믿음을 격려하는 것에만 초점이 있지 않다.
누군가의 믿음을 가장 잘 격려하는 방법은
그의 믿음으로 내가 위로를 받는 것이다.
나를 위로할 만큼 그의 믿음을 인정한 것이니
그에게 그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겠는가!

위로는 상대방에 대한 판단을 전제하지 않는다.
위로하는 나는 있는 자요, 위로받는 그는 없는 자라는 판단이 전제되면 안 된다.
우리는 서로 나눌 수 있다.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면서 서로를 채우고 굳건하게 한다.
위로하고 위로받는 과정에서 가장 빈번한 실책,
그것은 판단이다.
거기서 가르치려는 우월의식이 나온다.
가르치는 것은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나는 한 수 위요, 그는 한 수 아래라고 판단하는 것을 전제한다.
서로 대등한 위치에서 주고받는 것이 위로다.
가르치는 것이 위로가 아니라,
그의 믿음에서 내가 위로받는다고 하는 것이 위로다.
즉 내가 배운다고 말하는 것이 위로다.
좀더 낮아져야 위로를 할 수 있고 위로를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