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12:1-16, 나는 너희 징조라)

에스겔 선지자의 책에는
하나님의 영이 에스겔을 들어 올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성전 이곳에서 저곳으로,
또는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이동하게 하시는 장면이 눈에 띈다.
어제 말씀(11장)은 예루살렘에서 “주의 영이 나를 들어
하나님의 영의 환상 중에 데리고 갈대아에 있는 사로잡힌 자 중에 이르시더니”로 끝났다.
그러나 오늘 12장의 말씀은
에스겔이 특별한 행위를 통해 예루살렘 왕과 주민들에게 보여주는 예언의 이야기다.
즉 이야기는 11장과 12장 사이에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이동한다.
에스겔이 그렇게 주의 영에 들어 올려 이동한 것인지,
아니면 이미 예루살렘으로 이동했을 때 있었던 이야기를 지금 보여주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기록의 순서는 중요하지 않다.
선지서가 연대기의 순서대로,
즉 사건의 발생 차례대로 기록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지시하신 특별한 내용은
“포로의 행장을 꾸리고” “캄캄할 때에” 그 행장을 “어깨에 메고”
“얼굴을 가리고 땅을 보지 말”고 “성벽을 뚫고”
성밖으로 나가는 행동이었다.
에스겔은 그 지시대로 행동했다.
그러자 예루살렘의 백성들이 보고 “무엇을 하느냐” 하고 물었다.
바로 그 물음을 야기하기 위해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특이한 행동을 하게 하신 것이다.
그 물음은 희한한 행동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에 그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관심과 의문은 진실에 대면하는 결정적인 순간이 될 수 있다.
진실은 “예루살렘 왕과 그 가운데에 있는 이스라엘 온 족속에 대한 묵시”다.
“무엇을 하느냐”라고 질문하는 자는
그것은 “예루살렘 왕과 그 가운데에 있는 이스라엘 온 족속에 대한 묵시”라는 답을 들을 것이다.
그리고 에스겔은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 징조라”
무슨 징조인가?
에스겔이 “포로의 행장”을 연출한 것은 무슨 징조인가?
그렇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리라는 징조다.

아, 이 징조는 이미 예레미야가 숱하게 전했던 말씀 아닌가?
예레미야도 에스겔과 같이 실제로 특이한 행동을 통해
이스라엘 족속에게 일어날 일을 예고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얼마나 그들이 듣지 않았으면
이제는 바벨론에 끌려간 에스겔을 예루살렘으로 들러 올려
포로의 행장의 꾸리고 멸망과 포로의 상태를 예언하는 것인가!
얼마나 많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징조를 보이셨는가!
그런데도 그들은 듣지 않았다.

세상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유로 대는 구실은 “징조”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징조”를 보여 달라고 한다.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나님이 계신 근거를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그때 에스겔처럼 “나는 너희 징조라”고 하는 사명을 성도는 받았다.
성도가 과연, 아, 나는 과연
세상에게 하나님의 “징조” 노릇을 하고 있는가?
나의 삶은 하나님이 세상에 무엇을 하실지를 보여주는 징조가 되는가?
사람들이 나를 보면,
아! 하나님을 보는가?
그리고 나는 세상이 내가 “무엇을 하느냐”고 물을 계기를 만들고 있는가?
세상과 똑같이 살아 누구도 내게 “무엇을 하느냐”고 물을 빌미가 없으며,
오히려 그렇게 물을까봐 먼저 세상을 피하여 등지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도 꼴에 나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릴까봐
나로 인해 하나님과 연관될 질문을 차단하기 위해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사는 것을 상책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과연 “너희 징조”인가??
참으로 부끄럽고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