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9:1-11, 죄악으로 탄식하는 자와, 망하는 자)

드디어 심판이 시작된다.
심판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렀다.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에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영광이 아니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가증한 죄악으로 더럽혀진 성소에 임하여 심판하시는 권능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함으로 모든 죄악이 드러났다.
아무 것도 숨길 수 없다.
하나님 영광 앞에 어떤 죄악도 감히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드러난다는 것은 죄악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죄에 대해 두 가지 행위가 있었다.
하나는 죄를 짓는 것이다.
유다 백성들 거의 모두가 그렇게 했다.
특히 왕과 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선지자들부터 그러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데 있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통해 말씀을 전해도
가장 듣지 않은 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자신들이 하는 말이 하나님 말씀이요,
행위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이들이
하나님 말씀에 가장 반역하는 모순이 벌어졌다.

죄에 대한 다른 한 가지의 행위는 “탄식하며 우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지어도
그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시편의 첫 말씀과 같이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들이 분명 있었다.
그야 말로 “복 있는 사람”이다.
유다 왕국이 총체적으로 패역한 중에도
그 가운데서 행해지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
그를 하나님은 아셨다.
그만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에스겔도 바로 그런 자에 속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심판의 집행자들이 모든 행악자들을 칠 때에
“엎드려 부르짖어” 하나님께 탄원했다.
“아하 주 여호와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분노를 쏟으시오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두 멸하려 하시나이까”
에스겔도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였다.
그는 그것을 넘어서 하나님의 심판에 “탄식하며 우는” 자다!
그가 하나님의 공의를 부당하게 생각해서 그러하겠는가?
죄인들의 편에서 그러했겠는가?
아니다.
그는 죄인들에 대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자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한 하나님의 마음을 그는 가졌다.
죄에 대한 증오와 공정한 심판을 사모하는 정의감은
사실 죄인들의 멸망을 참으로 슬퍼하며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간절히 바라는 긍휼과 통한다.

하나님은 가증한 죄악을 행하는 자를 심판하시며,
동족의 죄악을 탄식하며 그들의 멸망을 하나님 앞에서 슬퍼하는 자를
그 심판에서 제하신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은 것 같거나,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가를 회의하는 자들은
그 질문을 오늘 말씀의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