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후서 3:6-18, 게으름의 경고)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두 번째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게으름에 대해 경고한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로
칭찬을 받은 이 교회에도 당연히 문제가 있었다.
다른 교회에 비하면 경미한 사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상의 차원에서 역시 중요한 문제다.

오늘 본문에서 반복된 경고가 있다.
바로 게으름에 관한 것이다.
교회 안에 게으른 자가 있었다.
사도들이 보여준 모범―사역자들이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했던 모범적 전통―을 보고도
도무지 배우지 않은 자들이었다.
바울은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명한다.
그들은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었다.

게으름은 왜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공동체에 부당한 부담을 준다.
그것은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좋지 않은 상황을 만나 어쩔 수 없이 일을 못하거나
일을 해도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는 불행한 경우가 아니다.
그러할 경우 공동체는 그를 돌보기 어렵다.
이러한 자에 대해서는 훈계가 필요하고
그것을 거듭 듣지 않으면 권징도 행해져야 한다.

그러한 게으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의 믿음에 부합하는 삶이 아니다.
아마도 그러한 자가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은
의도적인 게으름과 별도로 예배 참석이나 교회의 활동들에 참여하고 있음을 뜻할 것이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는 ‘신앙’을 과시하지만
생활에서는 전혀 신앙적이지 못하다.
그것은 그 자신의 신앙을 되짚어봐야 할 중대한 문제다.
누구나 믿음과 삶의 불일치의 문제를 겪는다.
그러나 그것이 연약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고칠 의도가 없는 고의적인 방임과 심지어 악용으로 행해지는 것이라며
아주 심각한 문제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소득이 적든 많든,
그것은 크게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게으른 것은 문제다.
성도는 근면해야 한다.
그러한 게으름은 자신을 파괴하며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
그것은 공동체적으로 엄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그러한 훈계나 권징의 내용을 바울은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그들과 사귀지 말라.
교제권에서 그를 배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로 부끄럽게 하여 뉘우치고 회개하기 위함이다.
즉 교제의 배제는 원수 취급이 아니라 “형제 같이 권면”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이러한 권징과 공동체적 질서가 살아있다면
우리나라의 교회가 훨씬 더 나아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