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23-31,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본다는 뜻이다.
어제 본문에서는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님의 약속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그것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다고 했다.

오늘의 주요 인물인 모세도 그러한 믿음의 사람이다.
그는 출애굽의 지도자로서 바로에게서 직접적인 위협과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애굽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다.
노예로 전락한 소수 이민족이
지배 민족과 세력에 저항할 때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바로 왕은 왕국의 모든 권력을 소유하였고
모세는 아무런 물리적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심지어는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를 신뢰하지 않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때 그가 본 것은 바로나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봄으로써 모든 것을 참아냈다.
현실적인 세력의 위협 앞에 그가 의지할 그 “보이지 아니하는 자”란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은
지금 잠깐 가려져 있지만 나중에 드러날,
잠시 출타했다가 곧 돌아올 분이 아니다.
하나님이 잠시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는” 분이다.
항상, 어느 곳에나 계신 분인데도 그러하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모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보는 것같이 하여”
모든 위기를 견디고 문제를 해결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보는 것같이 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심을 눈에 보듯이 믿었다는 뜻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그에게는 눈으로 보는 것같이 확실했다!
그것이 믿음이다.

믿음이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멀리서, 미리 본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기 전까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보다 더 한 것이 있다.
하나님의 약속만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아! 하나님이 보이지 아니하는 분이다.
그리고 믿음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같이 하는 것이다!
믿음의 진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데보다
하나님을 믿는 데에 있다!
믿음이 결국 보는 것이면
믿음으로 보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넘어서
하나님을 보는 데까지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을 보는 것같이 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하나님의 약속은
만일 그것이 나중에, 언젠가 이루어질 것이라면
그때까지는 아주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없어도
지금 여기에 항상 계신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나중에 오실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지금 부재중이 아니시다!
그러나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 앞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보이지 아니하므로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보이지 아니하지만
지금 여기 계시므로 하나님을 보는 것같이 하는 사람.

나에 대해 참으로 인자하신 하나님의 얼굴,
내가 실수했을 때 또는 하나님을 더욱 알게 되었을 때에 빙그레 웃으시는 표정,
내가 오래도록 죄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안타까워하시는,
나의 기만과 위선 그리고 약자를 무시하는 파렴치함에 격노하시는 하나님의 낯빛을
“보는 것같이” 내가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단지 생각만이 아니라 “보는 것같이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