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8:1-13,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성경에서 멜기세덱을 거론한 단 세 사람 가운데 하나다.
창세기와 시편(다윗)에 이어 히브리서에만 이 신비한 인물이 나온다.
그리고 비밀을 속 시원하게 풀듯이
멜기세덱에 관해 암시되었던 모든 뜻이 여기서 다 풀렸다.
사실 그것은 멜기세덱이 누구인지가 아니라
예수가 누구인지를 보이고자 함이었다.
멜기세덱은 예수를 이해하는 한 가지 중요한 열쇠다.

멜기세덱은 예수를 설명하는 여러 예 가운데 하나였다.
예수는 천사와, 모세와, 아론의 아들들인 제사장들과 비교되었다.
이야기가 다소 복잡하고 길어지자
히브리서 저자는 간단히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을 밝힌다.
그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
그가 여기 계시다!
히브리서는 세상의 구세주가 누구인지 이론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다.
그가 누구인지 밝히고 그가 바로 여기 있다고 선언한다!
구세주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
그것을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면
그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설령 그가 어디 있는지 안다고 해도 그곳에 갈 수 없다면
그것을 모르니만 못하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최대의 소식을 선언한다.
그가 우리에게, 여기 계시다!
이것이 요점이다.

왜 앞에서 길게 이야기한 것인가?
성경에 나와 있는데도 거의 모르는 신비한 인물을 언급하면서까지
설명한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께서 바로 그 중보자, 대제사장이시며,
그가 바로 여기 계시다는 사실 때문이다.
당시의 유대인은 ‘우리에게는 성전에 제사장이 있다’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제사장들의 한계는 너무도 명백하다.
그들 자신이 죄인이요 구원을 받아야 할 자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제사장으로 세우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위한 아주 부분적인 기능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영원히 계시”며 “항상 살아계셔서
그들(=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위하여 간구하”시는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다.

‘더 좋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비교급의 뜻이 아니다.
예표로서 부분적인 도구, 즉 “모형과 그림자”와는 비교할 수 없는
원형이요, 본체요, 진짜를 강조하기 위한 수사일 뿐이다.
우리가 믿는 예수는 앞으로 구현될, 여전히 본체를 기다려야 하는
“모형과 그림자”가 아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세주요 중보자이시다.
구약의 제사장은 한 세대를 살아내지 못한다.
그는 늙어 제사장 기능을 하지 못하고 결국 죽고
그 다음 세대가 그 직무를 이어야 한다.
그러한 제사장은 여기 우리와 함께 있어도 진정한 중보자가 되지 못한다.
그들은 계속 “모형과 그림자” 기능만 할 뿐이다.
그런데 이제 원형이요 본체요 진짜가 오셨으니 그러한 것은 필요 없다.
예수님은 영원한 대제사장이요 중보자로 여기 우리와 영원히 계시다.

그런데도 마치 구약 시대에 사는 것처럼
“모형과 그림자”를 떠받들고 살면 되겠는가!
여전히 구세주를 기다리는 자로 살아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