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9:1-34, 포로 귀환자)

역대기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뒤에 기록된 역사서다.
열왕기가 포로로 끌려간 여고야긴 왕이 옥에서 풀려난 사건(주전 561년)까지 기록된 것과 비교하면
역대기는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예언이 완전히 성취(주전 538년)된 것을 본 역사가들의 기록이다.
그 시기는 불과 23년밖에 차이나지 않지만
그 사이에 언약의 성취 여부가 달라지는 엄청난 차이가 발생한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자들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과 에브라임과 므낫세 자손 중” 일부다.
제사장은 예루살렘 성전에 있었고,
레위인은 각 지파로 분산되었는데 남유다 왕국에 속하는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 거주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 외에
“에브라임과 므낫세 자손 중” 일부가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유다와 베냐민 외의 열 지파는 북이스라엘 왕국에 속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도 이에 해당된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요셉의 두 아들로 북이스라엘의 핵심부라 할 수 있다.
수도였던 디르사와 사마리아 모두 므낫세 지파의 도시다.
그러나 두 지파는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했다는 점에서
남유다 왕국으로 들어오기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다.

북이스라엘의 백성 가운데
일찍부터 남유다로 왕래하며 신앙적으로 교류한 자들이 있었다.
북이스라엘 3대 왕 바아사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길을 막기 위해
베냐민 지파를 침공하여 라마를 통제했다.
분명 북이스라엘에서 신앙적 이유로 남하한 자들이 있었다.
아마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할 때
더 많은 수의 백성들이 남유다로 피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유다도 바벨론에 망하게 되자
북이스라엘 출신의 월남민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과 함께 바벨론에 끌려간다.
그리고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그들을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실 때
이들도 그 귀환자에 속하게 된 것이다.

본문에는 그들이 누구인지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소수였을 것이다.
그러나 유다와 베냐민 지파 이외의 백성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의 지파의 정체성을
남유다의 멸망 이전에도,
바벨론 포로 동안에도,
예루살렘으로의 귀환 이후에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남유다에 거주했지만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사람으로서 그렇게 했다.
그들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
오늘날 말로 한다면 시민권을 바꾸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영주권만을 누린 셈이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완성되는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이 누구인지에 대한 암시를 볼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혹은 유다의 백성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때부터 이미 분명히 보여주셨지만
이스라엘은 매우 배타적인 자기 해석에 빠졌고
예수께서 오실 때까지도 그러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만민을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셨다.
이로써 그때까지 먼저 되었던 이스라엘과 유대인이 나중 되었고,
나중 되었던 이방인들이 먼저 되었다!
먼저와 나중은 꼭 우열의 순서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방인이 이스라엘을 지배하거나 우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인종적 제한이 없으며,
하나님 나라의 구성은 인간적인 배타성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공평하심과 풍성한 긍휼이
아무도 억울하지 않게 하시며,
또한 아무도 자기 공로로 구원 받지 못하게 하신다.
누구든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받고,
누구든 구원을 받지 못하는 자는 자기 죄 때문에 심판을 받는다.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이요,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다.

바벨론의 포로에서 귀환한 자는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을 예표한다.
거기에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인종, 신분, 지위의 사람들이 있을 것이며,
심지어는 종교적 경건성과 소속 여부조차 우리의 예상을 넘어설 수도 있다.
역대기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유다와 다윗 왕의 자손들에게로 초점이 모아질 것이지만
거기에는 종국적으로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일부도 포함된다.
그것은 유다 지파조차 끝까지 남은 사람은 그 지파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도 의미한다.
그러니 먼저 믿었다고 조금도 자만할 수 없다.
다시금 되뇔 것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영적 진실이다.
예수께서 충분히 알아듣도록 강조하셨던 대로
오늘도 작은 자로서 예수께서 직접 오신다는 사실이다.
아, 그렇다면 전도하는 데 너무도 게으른 나의 영적 무력함은
사실은 나의 구원에만 만족하는 —심지어 그것을 정당화하는— 영적 오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