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3:1-4:43, 다윗 왕조의 시작)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조상들의 계보에서 중요한 갈림길 역할을 한다.
아브라함-이삭-야곱-유다,
이 과정에서 이미 여러 다른 경로의 가능성이 있었다.
유다에서 다윗에 이르는 계보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사람의 눈에는 얼마든지 다른 사람이 더 훌륭하고 뛰어나 보였을 것이다.
이새는 사무엘 선지자 앞에서 아예 막내 다윗을 없는 사람처럼 취급했었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다윗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하신다.

다윗은 도합 40년간 통치를 했는데,
처음 7년 6개월을 헤브론에서,
나머지 33년을 예루살렘에서 통치했다.
앞의 기간은 유다의 왕으로 뒤의 기간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다스렸다.
사울 왕이 죽은 뒤에도 다윗은 7년 반을 기다려야 했다.
그 사이에 여섯 아들을 낳는데, 모두 어미가 다르다.
국정이 불안했던 시기에 다윗의 가정도 불안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한 여인에게 더 집중하여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고
그 안정을 국정에도 반영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 시절의 왕에게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 이미 부인이 여럿이었다―
이러한 기대를 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예루살렘에서의 통치는 상대적으로 더 안정적인 시기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거기서는 안정적인 기반이 오히려 다윗을 더 가볍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일생 최대의 비극인 밧세바(밧수아)와의 간음과 우리아의 살인을 범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서만 여러 아들이 낳은 것은 또 다른 안정의 표지일까?
밧세바에게서 솔로몬이 태어난다.
그리고 그녀는 세 아들을 더 낳는다.
그러나 다윗의 불안한 가족사는 예루살렘에서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각한 일들이 벌어졌다.
그는 여전히 여러 아내와 소실들에게서 아들을 계속 낳았고
―가장 적합한 세자를 낳기 위해서든, 왕으로서 여인을 최대한으로 탐한 결과이든―
그것이 혹 왕권의 과시가 될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를 더 불안하게 한 것은 틀림없다.

역대상의 계보는 일차적으로 생물학적인 자손들에 대한 것이다.
세상의 역사에서는 그것이 가정의 구성과 왕조의 계승에서 절대적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넘어선다.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선별이 있다.
육신의 계보와 달리 영적 계보가 있다.
자녀가 많은 것은 분명 한 아내―자녀에게는 한 어머니―를 통해서일 때에만
영적인 축복이다.
혹시 일단 많이 낳아놓고
그 가운데 누구든 하나님께서 선별을 하시면 되는 것 아닌가
―아브라함도 다분히 그런 생각을 했다― 하는 생각이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빙자한 자신의 쾌락과 과시의 합리화에 불과하다.

어찌 되었건 가정은 거룩해야 한다.
물론 인간의 ―특히 남자의― 탐욕에 의해 저질러지는 죄악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용서하시고 선한 도구로 이용하시는지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긍휼에 달려 있다.
그리고 오늘날 더욱 중요한 가족, 계대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육신을 통해 낳는 생물학적 출생, 계보가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 되는 가족의 구성이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 즉 하나님을 믿는 자가
곧 예수의 가족이다.
내 몸에서 낳았다는 사실보다
나와 믿음을 나누는 형제자매, 아비 자녀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혈통에 의한 가정은 참으로 ―바라건대 무조건―
믿음의 가정이 되어야 복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