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13:1-14, 힘을 다했으나)

다윗이 드디어 이스라엘 열두 지파, 온 백성의 왕으로 추대되고
그가 처음 한 일은 —역대상의 순서로는—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일이었다.
블레셋에게 빼앗겼다가 반환되었지만
기럇여아림에 방치된 언약궤.
즉 성막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성막의 지성소에 언약궤가 부재했다!

다윗이 이 궤를 옮기려는 의도와 목적은 “궤 앞에서 묻”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 앞에서 묻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기도하며 결정하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윗은 이 일을 “모든 지휘관과 더불어 의논하고”
“온 회중에게 이르”는 절차를 확실히 했다.
역시 다윗이었다.
그는 어떻게 의논할 줄을 알았다.
합의의 과정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일의 결정 기준이다.
“만일 너희가 좋게 여기고 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즉 하나님의 뜻과 백성의 뜻,
하나님이 원하시고 백성이 원하면,
이것이 이 일을 행할지 아닐지를 아는 기준이다.
물론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것이 절대로 중요하다.
만일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는데도 백성들이 좋게 여기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아마도 사안에 따라 어떤 것은 더 기다려야 할 것이고
—백성들이 깨달을 때까지—
어떤 것은 명령하여 복종케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백성들도 원하는 것이다.
인격적이신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중시하신다.
사람의 마음을 감화하신다.
다윗은 이 중요한 기준을 만족시켰다.

그리고 기럇여아림에서 언약궤를 옮기는 일을
온갖 성의와 열정과 힘을 다하여 준비하고 실행했다.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면서 궤를 옮겼다.
대충 형식적으로 하지 않았다.
“힘을 다하여” 하였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여 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하였다.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다른 비극적 사건이 벌어졌다.
궤를 실은 수레를 옮기는 소들이 갑자기 놀라 뛰었고
수레를 몰던 웃사가 궤가 떨어질까봐 손을 대자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므로 웃사가 즉사했다.
아, 그의 몸이 갈가리 찢기는 방식으로 그 일이 일어났다.

우리는 이 사건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다 안다.
언약궤는 수레로 옮기는 것이 아니고
레위인들이 궤를 채에 꿰어 메고 운반해야 한다.
그러나 다윗은 거기까지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것은 참으로 놀랍고 의아하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힘을 다하여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이 상식적인 일을 생각하지 못할 수 있을까?
아마도 언약궤를 옮기는 일은 출애굽 이후 시내 광야에서,
그리고 가나안 정복의 과정에서는 일상사였을 것이나
이제 정착 사회가 이루어진 뒤에는 성막이 옮겨 다닐 일이 없게 되자
궤를 옮기는 방법조차 까마득히 잊힌 것일지 모른다.
이것은 다윗 혼자만 잊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모든 지휘관과 더불어 의논했다.
다윗이 이 일을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지휘관”
즉 군대 지휘관들 중심으로 논의한 것이 문제였을까?
그럴 수도 있다.
이 일의 의논 과정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동참하지 못한 것인가?
그보다 이 종교지도자들도 궤의 운반 방법을 잊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애초에 수레에 궤가 실어질 때 이의가 제기되었을 것이다.
이들 모두 확신에 차서 “힘을 다하여” 찬양하며 궤를 실은 수레를 옮겼다.
그러도록 누구도 자신들이 뭘 잘못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가장 상식적이고 중요한 일을 모두 간과한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절차와 의도와 목적과 힘을 다한 열정이
단번에 수포로 돌아갔다.

아, 하나님께서 즉시, 직접 간여하셨기에망정이지,
하나님께서 즉시, 직접 간여하지 않으시는 경우가 대부분인
오늘날의 그 숱한 ‘주의 일’에 이러한 문제가 얼마나 많겠는가!
어떤 일들은 분명 잘못된 것인데도
“여호와께서 치시”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그대로 진행된다.
그것을 위한 축복과 헌금과 기도가 동원된다.
이때 정말로 이 일이 옳은가 아닌가를 정확하게 살피는 데 민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윗의 언약궤 운반 첫 시도 과정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 누구도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누구도 출애굽기를 레위기를 들춰보지 않은 것이다!
교회에서 하는 일이면 모두가 ‘주의 일’인 것은 아니다.
목사가 주도하고 당회가 추진하고 신앙적 열정으로 모두 힘을 합하면
축복된 ‘주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말씀을 살피고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면
모든 일이 수포로 될 수도 있다.
당장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지 않으셔서 그 일이 ‘주의 일’로 계속 추진된다면
그 자체가 비극이요 하나님의 진노 아니겠는가!
말씀으로 살피는 일에서 지혜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나의 묵상은 참으로 형식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