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8:5-14,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아가서의 결론은 이것이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같이 잔인하며 불길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사랑이 질투와 함께 나오고,
둘 다 강하기가 죽음과 스올 이상이며,
결국 하나님과 관련된다.

사랑과 질투는 정반대의 것이다.
그러나 질투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며,
사랑이 없이 질투는 강할 수 없다.
질투가 없는, 그리하여 아무래도 좋은 것은 사랑이 아니다.
이때 질투는 자기 유익을 구하는 질투가 아니다.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기 때문에 질투를 갖는다.
사랑과 질투는 좋은 짝을 이룬다.
이 둘이 서로 동행하지 않으면 병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이 사랑은, 그리고 질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사랑이요 질투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사랑이 이러하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이방 우상을 향하여 나갈 때
하나님은 방관하거나 태평하거나, 특히 무관심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수도 없이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잘못된 데서 구하려고 하신 사랑이
바로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질투라고도 하셨다.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 하는 질투의 하나님”이시다.(출애굽기 34:14)
이 질투가 나를 살리셨다.
내가 무엇이 되어도 상관없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것을 세상은 관용이요 넓은 사랑이라고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그것은 그저 피차 편하려는 것이요,
그 편함이란 결국 지금, 현재의 편리를 추구한 것에 불과하다.
그냥 내버려두면 사고를 당하고 죽을 게 뻔한 상황에서
아이가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는 ‘관용’과 ‘넓은 사랑’을 가지고 있는 부모는 없다.
질투는 악한 상황에 빠진 자에 대한 간여다.
그 간여는 그를 구하려는 것이므로 사랑이다.
하나님이 그러셨다.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고 질투가 스올만큼이나 강한 것은
하나님께서 바로 신부인 나의 구원을 위해 죽음을 택하심으로써 분명히 나타났다.
십자가의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에 비해 사람의 사랑은 죽음보다 약하다.
사랑을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놓을 수 있을까?
예수님이 한결같이 강조하신 자기 부인이 바로 이 사랑인데,
결국은 나의 최대 문제요 과제요, 치명적인 약점은 자기 부인이다.
내가 나를 부인하지 않고,
내가 죽지 않고 나만 살려는 것이 문제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나를, 목숨을 다해 사랑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