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2;15-22, 말의 올무)

마지막 한 주간 예수님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사역에 힘 쓰셨다.
그 중심은 천국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유다의 중심 예루살렘,
그것도 성전에서까지 군중들을 가르치는 일이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위협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했다.

“올무”란 새나 짐승을 잡기 위해 만든 올가미다.
이것은 사람에게도 적용되어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유인하는 책략이다.
그것은 함정, 곧 자기도 모르게 빠져 나올 수 없는 위장된 구덩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말의 올무”에 빠지게 하려고 한다.
예수님께서 가장 많이 하시는 사역이 가르치는 일이므로
거기서 예수를 책잡을 빌미를 찾겠다는 것이다.

‘말의 올무’, 그것은 ‘행동의 올무’가 아니다.
오늘날은 더욱 가상공간에서의 무한한 교신을 통해
사람들의 언어적 표현이 지대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말 한 마디 잘못하면 즉시로 사회적 매장을 당한다.
물론 지도자를 검증하는 차원에서
공적 인물이 될 이 사람의 모든 것을 저울에 달아보는 것은 매우 슬기로운 모습이다.
그러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말의 올무로 사람들을 공략하고 궁지에 몰아넣는 것은
사회의 전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오로지 비방하기 위해 모든 것을 샅샅이 뒤져
조금이라도 흠이 될 여지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잡으려면 ‘말’이라는 올무가 아니라
‘행동’, 또는 ‘행실’의 올무를 놓았어야 할 것이다.
말의 일관성보다 행동의 일관성이 훨씬 더 심각한 문제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는 행동과 보지 않을 때 하는 행동이 다르다면
그것은 얼마든지 행동의 올무감이다.
그러면 말의 실수로 인한 문제보다 더 큰 책임을 지울 수 있다.

그들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려는 것은
역으로 예수에게서 ‘행동의 올무’에 빠지게 할 수 없음을 반증한다.
예수를 행동으로 책잡을 여지는 전혀 없었다.
예수의 행동은 조금도 서로 모순적인 행동이 없었으며 말과도 일치되었다.
그런데도 이들이 예수께 접근하는 것은
오로지 올무에 빠뜨려 그의 기세를 끊으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들은 대답하기 곤란한 것을 엮어 예수를 시험하는 장치로 이용했지만
예수에게서 어떠한 말실수도 찾을 수 없었다.
만일 그들이 예수를 ‘행동의 올무’로 잡으려고 한다면
그들은 더욱 궁지에 빠질 것이다.
예수에게서 어떠한 행동의 문제도 찾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의 시험 내용은
“가이사에세 세금을 내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으로
오히려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으셨다.
말의 올무도 행동의 올무도 예수께는 아무것도 통용되지 않았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은
오늘날 더욱 타당하고 중요하다.
당연히 이것은 하나님과 가이사(황제) 사이에 역할을 분담했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서 내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실 영역은 단 한치도 없다.
“가이사”는 하나님의 주권아래서 로마의 황제로 뽑힌 자다.
그는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다.
즉 “가이사의 것”이란 하나님께서 “가이사에게” 내도록 정하신 세금을 의미한다.
간단한 결론을 말한다면,
성도는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국가의 범위 안에서 세금을 낼 의무가 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라도 탈세할 수 없다.
징세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세금을 통해 유지될 사회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도 “말의 올무”를 발견할 수 없는 이 진리대로 사는 것이
‘행동의 올무’에 빠지지 않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