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1:12-22, 성전의 큰 자, 작은 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이번이 생애 마지막의 일이다.
예수님은 며칠 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계시다.
군중들이 왕을 맞듯 환호했지만
결국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일이 벌어질 것을 다 아신다.
이 비장하고 처연하고 심각하고 외로운 한 주간의 일정 중에
예수님은 성전을 방문하셨다.
사실 이 며칠 동안에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공통적으로 기록되는 대로 상당히 긴 분량의 말씀을 하셨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여러 비유로 가르치시고
시비를 거는 자들과의 논쟁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다.
이 중요한 마지막 날들 동안에 예수의 행적은 말씀으로 집중되고
외적인 행보는 거의 이 성전 방문만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만난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첫째는 매매하는 사람들, 돈 바꾸는 사람들, 비둘기 파는 사람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둘째는 맹인, 저는 자들, 어린이들(아기와 젖먹이들).
예수님은 성전을 “기도하는 집”과 “강도의 소굴”로 구분하심으로써
전자의 사람들을 강도로, 후자의 사람들을 기도하는 자로 비유하신 셈이다.

이것은 또한 앞에서 상당히 중요하게 지속적으로 언급하셨던
“작은 자”와 “큰 자”의 비교와도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후자의 사람들은 “작은 자”에 속한다.
장애인들, 환자들, 어린이들.
전자는 “큰 자”에 해당된다.
높은 지위에 있고, 돈도 있는 자들이다.
‘작은 자’들은 예수께 진실하게 반응했다.
맹인과 저는 자들이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주셨다는 것은
그들이 고침을 받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적어도 도움을 받기를 열망하면서 성전에 왔다는 뜻이요,
그들이 예수를 보자 바로 그 간절한 열망을 아뢰러 예수께 다가갔을 것이다.
그것은 곧 “기도”다.
자신의 현실을, 사람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 문제를
예수께 가지고 가는 것이 바로 기도다.
그들은 성전에서 기도하는 자였고,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일컫는 자였다.
어린이들, 곧 아기와 젖먹이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예수를 “찬미”했다.
기도는 간구와 찬양을 그 내용으로 하는 점에서
그들도 곧 기도하는 자였다.
그들의 기도는 대부분의 어른들이
예루살렘 성문에서 예수를 환호하며 맞았던 짧은 순간을 뒤로 하고
곧 태도가 돌변하는 경우와 다른 것이었다.
그들은 성전에서 예수를 찬미했다.
그들은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든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작은 자”들이 결국 성전을 지키는 자였다.

상인들, 즉 성전에서 많은 이익을 남기는 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은 “큰 자”들이다.
그들은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누린다.
돈을 벌고 명성과 권위와 높은 지위를 누리며 존경을 받기까지 한다.
아마도 그들은 바로 기도하는 집인 성전에서
딱히 기도할 것이 별로 없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다 가지고 있는 자들 아닌가!
그러니 그들이 할 일은 결코 기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넘칠 정도로 많이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더 배가하기 위해 성전에 와서 연약한 “작은 자”들을 등쳐먹고 있는 셈이다.
아, 큰 자가 작은 자 위에 군림하고 자신의 배를 불리는 것이
에덴동산 이후의 인간 역사에서 가장 흔한 일 아닌가!
그것이 성전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성전도 역시 약육강식, 적자생존, 자연도태의 현장이다!
그들에게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기업 현장이요 시장이요 고객관리를 하는 곳이다.
그들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나는 성전에서 “큰 자”인가 “작은 자”인가?
나는 정말로 하나님을 찬미하며 기도하러 성전에 가는가,
나를 드러내고 자신의 위로를 삼고 ―자기연민도 포함하여―
자기 의를 드러내러 가는가?
나는 큰 자들에게 잘 보이려 하는가,
작은 자들을 위하고 돌보려 하는가?
성전은 나를 팔고(과시하고) 형통을 사는 시장인가,
하나님께 숨죽이며 낮아지며 기도하는 골방인가?
한 마디로 나는 성전에서도 사람들을 판단하고 있지 않은가?
큰 자로서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성전에서 내가 높아지는 가,
주님이 높아지고 있는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