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1:1-11, 주가 쓰시겠다)

성경에서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장면 중 하나가 오늘 본문이다.
예수님은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벌써부터 심각하게 인식하고 계셨고
제자들에게도 귀띔을 하시지만 거의 쇠귀에 경 읽기 꼴이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입성을 특별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바로 성경의 예언을 이루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갑작스런 착상에 의한 관심 집중 용 행사들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여기저기서 부분적으로 하신 말씀들이 있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
즉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그 말씀을 하신 장본인 가운데 한 분이신 예수님께서
그 말씀들을 다 알고 계시고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계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들르라고 명한
감람산 벳바게 맞은편 마을의 한 사람은
거의 예수님에 준할 정도의 그 예언의 말씀들에 대한 특별한 이해가 있었다.
전능하신 주님은 물론 아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도
예언의 말씀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다.
길에 있는 아무나의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움직이셔서
본문의 일을 이루실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나귀새끼 주인이 한 행동은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에 정확히 의거하였을 것으로,
즉 그가 이미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러한 날을 기다리며
준비해왔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세주를 기다리는 특별한 열심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중에 스가랴의 말씀에 감화를 받고,
어쩌면 얼마 전에 태어난 자기 집 나귀새끼를
구세주를 위해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기도 했을지 모른다.
충분히 가능하다.
성경을 깊이 묵상하는 자라면
모든 말씀에서, 더구나 구세주를 약속하는 예언의 말씀에서
그것의 성취를 간절히 열망하는 일이 왜 불가능하겠는가.
그는 자기 집 나귀새끼를 보며
그 위에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는 겸손한 왕을 생각했을 것이다.
누군가 와서 “주가 쓰시겠다”라고 하기만 하면
스가랴 말씀이 성취되는 것으로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월절이 코앞에 이른 어느 날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그는 목도하며
얼마나 흥분되며 긴장이 되었을까.

결국 말씀의 묵상이 구세주를 제대로 기다리게 하며,
정말로 그날이 되었을 때에 어떻게 행동할지를 가르쳐주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