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12;1-26, 이제는 마음껏 주를 찬양하고 감사하며)

1차 포로귀환의 지도자는 스룹바벨 총독과 예수아 제사장이었다.
그때 함께 온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명단이 본문에 기록된다.
그보다 한참 뒤에 제사장 에스라가 2차 귀환을 했고,
최종적으로 총독 느헤미야가 3차로 돌아왔다.
여기 언급된 인물들은 바벨론(페르시아)에 있다가 돌아온 자도 있고,
그 다음에 유다에서 출생한 그들의 후손도 있다.

우선 바벨론에 끌려갔다가 수십 년 뒤에 돌아오기까지
유다 지파 가운데 정치적인 지도자인 총독과
종교적인 지도자인 제사장과 레위인이 계속 이어졌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다.
총독의 경우 물론 바벨론에서 그 직위가 계속 이어진 것은 아니다.
고레스 왕이 스룹바벨을 총독으로 유다에 보냈고,
거의 한 세기 후에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를 역시 총독으로 파견했다.
어떻게 이방의 왕이 유다 왕조의 혈통을 중시하여
그 지파에서 왕을 대신하는 총독의 직책이 나오게 했을까!
또한 영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의 계대가
끊어지게 하는 억압을 어떻게 어느 왕도 실행하지 않았는가!

이 본문을 읽으며 시편 137편의 말씀이 생각난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로 시작하는 그 슬픈 시.
바벨론 지배자들은 유다 포로로 하여금 시온의 노래를 하라고
―분명히 한 곡조 뽑으라고― 청했다.
그것은 당연히 유다의 문화를 감상하겠다는 교양 있는 문화적 요청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롱이었고 희롱이었으며 모독과 치욕이었다.
그리하여 시인은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하고 탄식한다.
그러했던 수모 속에서 이들이 견뎠다.
특히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은 그들 앞에서 “여호와의 노래” 부르기를 거절하면서도
속으로 그 노래를 망각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되뇌고 자손에게 전수했을 것이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 아니할진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목 놓아 ―속으로― 불렀다.

그런데 이제 이들이 유다로 돌아와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직분을 수행한다.
수십 년 동안 공식적으로 끊겼던 그 직무를 다시 수행한다.
“함께 찬송하는 일을 맡았고” “다윗의 명령대로 순서를 따라 주를 찬양하며 감사하고”
이들은 찬송을 잊지 않았고 다윗의 명령을 망각하지 않았다.
순서를 따라 주를 찬양하는 법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즉 바벨론에서 계속해서 자신이 제사장인 사실,
자신이 레위 사람인 사실이 전해졌으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즉 “함께 찬송하는 일을” 하며,
“다윗의 명령대로 순서를 따라 주를 찬양하며 감사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것을
그들은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참으로 놀랍게도
그 수십 년 동안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법이 변질되지 않았다.
역사에서 이러한 특수한 상황―박해, 고립, 단절―에서는
신앙이 얼마나 쉽게 변질되는 지를 많이 볼 수 있다.
가장 일반적으로는 다른 종교와 미신과 어렵지 않게 혼합되는 현상이다.
심지어는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그러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들은 그것을 잘 전수했다.
물론 잊은 것이 있었지만,
그리하여 성벽을 재건하고 모여 성경을 읽는 중에
새로 깨달은 말씀들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세상에 모든 희망이 다 끝난 것 같은 타지에서의 몇 십 년 동안
이들은 제사장과 레위 사람과 왕족의 정체성을 계속 이어간 것이다.
그것은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인가!

그리하여 이제는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바벨론에서 인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기서 포로 생활을 하는 중에도 변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다.
아, 나의 자녀와 그 자녀들이 어디에 있든지
이렇게 신앙의 정체성을 계속 이어가기를 간절히 바라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