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11-19, 천국과 이 세대)

오늘 본문의 두 단락은 각각 천국과 이 세대를 대비하고 있다.

천국은 역동력이 왕성하다.
‘강약이 부동이라’ 이런 말이 천국에는 통하지 않는다.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여기서 “그”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다.
그러한 자가 천국에서는 크지 않고,
그보다 작은 자가 천국에서 크다.
예수님은 앞으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사람이 보고 평가하는 시간적인 우선, 규모의 크기가
천국에서는 얼마든지 역전된다.
천국에는 진리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 진리는 곧 예수님이요,
예수님은 이 땅에서 작은 자의 모습으로 종종 나타나신다.
그러면 천국에서 세례 요한보다 클 “극히 작은 자”는 곧 예수님이시다.
천국은 이 땅에서 통용되는 크기나 상하나 강약과 전혀 다른 기준이 작동한다.

반면에 이 세대는 천국의 역동성이 없다.
강약이 부동이며,
진리가 환영받지 않고 진리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고착된 기준이 있어 작은 자, 낮은 자, 약한 자가
어떠한 경우라도 배제되게 되어 있다.
진리가 아니라 오로지 세력의 크기로 상하와 강약이 결정된다.
이 세대의 규칙에 의해서 진리가 평가되고 비판되고 거부된다.

그러나 천국의 진리는 죄의 회개를 전제하므로
때로 금식하며 철야할 이유가 있으며,
또는 진리이신 신랑의 잔치에 들어갈 때 기쁨과 즐거움을 누린다.
천국에서는 진리가 세리와 죄인을 환영한다.

오늘날 이러한 파격적인 교훈과 실천이
우리나라의 교회에 매우 드물다,
또는 없다!
그래서 교회도 이 세대와 똑같이
굳어진 강약과 상하의 질서 속에서
어떻게 하든 위에 있고 강해지려고 하며,
그렇게 되는 비결을 팔려고 한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나는 더욱 역동적이지 못하고 굳어져 있다.
예수님의 그 열린 눈과 마음이 없이 고정된 잣대로 판단하고 정죄한다.
내 안에 진리가 살아서 역동하고 있는가?
그래서 누구를 만나도 일체의 편견 없이 이해하고 존중하는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천국의 역동성에서 나는 너무 멀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것이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내가 참으로 회개하는 자가 되어야, 참으로 낮은 자가 되어야
천국의 살아 있는 역동성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