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0:24-33, 제자가 선생과 같으면 족하도다)

선생과 제자의 관계.
그것은 세상에서 꽤 아름답고 고상한 사이처럼 보인다.
선생은 제자에게 가르쳐 그 수준을 높여주고
제자는 선생에게서 배워 선생을 존대한다.
사제 간의 관계란 선생에게는 보람이요 제자에게는 가치를 안겨준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만일 제자가 선생보다 더 많이 알게 되고
그 기량이 선생의 수준을 넘어서면
결국 선생이 아주 두려워하는 일이 벌어지는데
바로 사람들이 선생보다 제자의 권위를 더 인정하는 것이다.
누구나 민감한 것이 사람들의 인정이요 비교인데
그것이 역전되는 것을 감당할 사람이 많지 않다.
그리하여 애초부터 선생이 제자의 권위를 우열로 정해놓고
평생 자기 밑에 있게 하려는 억압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제자들을 자신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올려놓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요, 제자들은 피조물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종교 가운데는 인간이 신으로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애초에 그 종교의 수준, 신의 수준이 얼마나 낮은가를 보여줄 뿐이다.
맨 처음에 창조된 죄 없는 인간의 상태도,
마지막에 구원받고 회복되어 새 하늘과 새 땅에 살게 될 새로운 피조물들도
결코 신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전한 피조물이 되는 것이 구원이다.

예수는 사람들을 허황되게 현혹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가 선생을 따라 그가 하는 대로 행하고
그의 수준에 이르기를 예수님은 원하셨다.
그것은 제자들을 신이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높여놓겠다는 것이 아니라,
땅에 몸으로 오신(성육신하신) 예수의 온전한 인간의 모습을 닮는 것 아니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온전한 피조물이 되는 것,
그것이 제자의 목적이요 본질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으로 낮아지셔서 결국 죄인들을 높이신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하나님의 회복된 피조물이 되게 하기 위해
성육신으로 낮아지신 것이다.
“제자가 그 선생과 같고 종이 그 상전과 같으면 족하도다”,
이 말씀이 이런 뜻 아니겠는가.

복음서의 모든 기록에서 이 뜻이 다 구현되지만,
오늘의 본문 두 단락에서 바로 그 예를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예수를 계속해서 모함하고 죽이려하고 결국 고소에 성공한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 이러한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공회의 판결도 빌라도의 법정도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수를 죽일 것이지만
그것은 예수의 몸에만 손을 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처절하게 고통스러워하며 두려워한 것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것이다.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예수는 두려워했다.
오직 이 하나님 아버지의 권위만 경외(두려워)했다.
우리는 생략하고 넘어가는 사도신경의 고백처럼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뒤에 음부에 내려가셨다.
그냥 몸의 고통만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진실로 죄인이 갈 곳까지 감으로 그 죄를 대속하셨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몸에 손을 대는 자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영혼에 대해 권한이 있으신 하나님만을 두려워할 것이다.

또한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시인하거나 부인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시인하셨다.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임을 시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숨기거나 때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는 전략을 구사하지 않으셨다.
예수는 결국 하나님 아버지를 시인함으로써,
즉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주장함으로써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했다.
그것을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당하셨다.
초대 교인들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시인하는 일에 이와 똑같았다.
공적으로 예수를 시인함으로 고난을 당하고 순교하였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했다.

나는 나의 스승이신 예수님께 얼마나 같아지고 있는가?
나의 두려움과 시인은 과연 그러한가?
몸과 물질적인 것, 세상의 것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얼마나 넘어섰는가?
나의 근심이 여전히 이것들에 얽매인 것이 많다.
나의 시인과 부인 여부는 더욱 부끄럽다.
나의 믿음은 너무도 사적인 영역에 제한되어 있다.
공적으로 예수를 시인하는 일이 오늘날 비상식적인 일로 치부되는 시대에,
뱀 같은 지혜와 비둘기 같은 순결함
―잔꾀를 부리지 않고, 쉽게 혼합주의에 빠지지 않는―을 참으로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