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2:22-30, 세상의 단결에 맞서)

이미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사역을
알곡과 쭉정이의 구분―알곡은 곳간에,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으로 은유하였듯이,
예수님 자신이 검과 불화로 세상이
―심지어는 가장 기초적인 단위인 가족까지도― 갈라질 것을 강조하셨다.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며 그 심판을 면할 자를 구원하신다.

마치 훼방꾼처럼 보이는 예수님의 분리 사역은
근본적으로 이 세상이 죄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죄에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 한다.
그러면 당연히 죄의 세력과 싸움이 벌어진다.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예수께서는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심으로,
즉 귀신들을 쫓아냄으로써 그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셨다.

질병의 치유가 이미 보통 일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정확한 진단을 통해 오랜 경험으로 명약을 처방하여 병을 고치는 의사가 아니었다.
세상에서는 그러한 자를 명의라고 높일 것이지만
예수님은 말로 명하여 병을 고치고,
심지어는 환자가 예수께 손을 댐으로써 치유가 되기도 했다.
예수님은 높은 치유의 확률로 이름을 날린 것이 아니라
예수께 나아오는 자는 누구든지, 그리고 어떤 병이든지 다 고쳐주셨다.
역사에 이런 일이 없었다.
심지어 신체적인 질병만이 아니라
귀신들이 준동하는 영적 차원의 현상도 예수께서는 전능하게 다스리셨다.

그러자 예수를 적대하는 바리새인들이
그 사역을 귀신의 장난으로 몰아부쳤다.
귀신들이 서로 짜고 하는 것이다.
귀신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폄하했다.
그러자 예수께서 세상의 본질에 대해 명확히 밝히신다.
귀신들은 서로 싸우지 않는다.
그러면 귀신의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즉 예수는 지금 병을 고치고 귀신들을 내쫓으며,
근본적으로는 복음을 선포하고 죄인들을 구원하며 천국을 세우는 사역을 하심으로
세상을 분란케 하는 사역을 하시는 것이다.
세상이 예수를 믿는 자와 부인하는 자로 둘로 나뉘어 불화할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귀신의 힘을 빌려 귀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을 내쫓으심으로 귀신의 세력을 파괴하신다.
이것을 귀신이 자초하겠는가?
어리석은 궤변이다.

이 진리는 특히 현대로 올수록 더욱 분명해진다.
역사 이래로 모든 사조와 문화가 하나님께 적대적이다.
가인의 후손들이 세운 문명부터 21세기의 탈근대주의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사조는 하나님을 등지며,
결국 예수 믿는 것을 거부한다.
사상들이 저희들끼리는 다투기는 해도
기독교에 대해서만큼은 일치단결하여 적대적이다.
예수님 앞에서 세상은 똘똘 뭉친다.
예수께 반대하는 일에 세상은 하나다.
마르크스주의도 자본주의도 유물론이라는 점에서 하나가 되어
예수 믿는 것을 우습게 알며 폄하하고 적대한다.
서로 안 맞는 이슬람도 동성애주의도
기독교에 대해서 적대적임으로써 단결한다.
대저 하나님의 영, 예수의 영, 곧 성령께로부터 나오지 않은 모든 것이
이 세상에서 모두 예수께 적대적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모든 것에 불화할 수밖에 없으며
그것들과 싸우도록 검을 주신다.
예수님은 예수께 나아오는 자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심으로
세계를 온전히 하나가 되게, 창조의 아름다운 질서로 회복시키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께 나아오지 않는 자들과의 불화,
그들에 대한 대적과 심판을 전제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이 바라는 것처럼
좋은 게 좋은, 두루뭉수리로, 회개도 없이 모두를 구원받은 자로 선포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정의롭게 양과 염소를 구분하신다.
예수님은 공의로운 판단으로 긍휼을 베풀 자에게 구원을 주시고
심판 받을 자를 거기서 배제하신다.
예수님의 대답은 이것이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아, 나는 이 점에서 세상과 너무 화평을 누리고 사는 것이 아닌가?
예수께서 화평케 하는 자의 복을 말씀하실 때
그 의미의 낮아지고 품는 사랑의 화평은 멀리하면서,
반면에 진리와 거짓, 정의와 불의가 구분되는 불화에는
용기를 내지 못하고 융화되고 타협하면서
화평케 ―사실은 태평하게― 사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