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2:14-21, 심판을 알리되 다투지도 아니하며)

앞에서도 나왔듯이 예수님이 정말 약속된 구세주인지는
그의 행위와 성품을 보아야 할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것이 과연 이미 약속된 내용에 부합하는가에 있다.
구세주는 희한한 기적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약속된, 예언된 행동을 하시는 분이다.

예수께서 하신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본문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를 인용하며 강조한다.
그 내용은 무엇인가?
구세주가 오실 것이다.
곧 하나님께서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결국 “이방인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물론 여기서 복음의 선포와 그 결과가 “이방”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만 선민으로 알고
구원을 혈통적 배타성으로 신봉하고 있는 자들에게
구약성경이 이미 “이방”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과 이방 모두에게,
즉 혈통적 경계를 넘어 누구에게나
구세주를 통한 심판과 긍휼이 선포되고 시행될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런데 “심판”을 선포하는 구세주라면
다분히 냉엄한 투사로 인식되기 쉽다.
역사에서 사회의 부조리를 지적하고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한 혁명가들은
투사였다.
그들은 잘못된 기득권을 뒤엎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실제 물리적인 힘을 모으는 데 주력했다.
그들은 조직화하고 세력화했으며
다수의 힘을 통해 소수의 지배자들을 전복시켰다.
그들은 투쟁가였다.
그렇게 해서 역사적인 심판이 행해졌다.

그러나 성경에서 구세주는 그렇게 예언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예언을 성취하는 예수 그리스도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구세주는 투사로서 폭력적 혁명을 수행할 자로 예언되거나 약속되지 않았다.
오신 구세주인 예수는 폭력적 심판을 수행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심판을 알리되,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였다.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예수님은 많은 설교를 하셨고 소리(음성)를 내어 가르쳤지만
그것은 다투고 들레는(야단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폭력적 선동을 하지 않았다.
아, 그 반대이지 않은가?
예수님은 법정에서, 십자가 형장에서 다투지 않으셨다.
다투는 소리를 내지 않으셨다.
다투도록 군중을 동원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님은 심판을 알게 하면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는 긍휼을 베풀었다.
예수님은 제사라는 율법의 규정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자부심에 찬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제사가 아니라 긍휼이라고 강조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람들이 더 이상 짐승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도록
아예 자신을 제물로 드려 죄인들을 대속하셨다.

그리하여 어떤 일이, 결과가 벌어졌는가?
지금까지 하나님의 구원에서 배제된 줄 알았던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는 일이 벌어졌다.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구세주의 이름을 바라기 시작했다.
온 세계의 사람들이 이스라엘에만 국한되는 것으로 보였던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게 되었다.

이 말씀을 보면서 내 마음에 가장 부딪치는 것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신 예수님의 모습이다.
나는 지금 마음속에서 많이 다투고 들레고 있다.
도대체 뭘 싸워서 이기려고 시끄러운 소리가 마음속에 가득하다.
나는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는 것도 아니면서,
내가 정의의 사자인 것도 아니면서 그러고 있다.
예수님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실 때,
정의를 선포하고 구현하실 때
나같이 시끄럽게, 싸우듯이 하지 않으셨다.
내속의 시끄러움은 결코 정당한 하나님의 의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면 더욱 조용해야 한다.
그것이 정당하지 못하므로 신속히 그 시끄러움을 그쳐야 한다.

내가 할 일은 주장이 아니라
“그의 이름을 바라”는 것이다.
이 말씀과 순종 앞에서 내가 낮아지고 조용해지고 평안해져야 한다.
예수께서 날 조용히 꾸짖으심을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