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20-30, 예수의 멍에를 메는 자)

세상에 가장 많이 알려진 성경구절 가운데 하나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짐”과 “멍에”의 은유를 사용하신다.
이 둘은 다 부담스러운 것들이다.
짐은 등에 지었든 손에 들었든 머리에 이었든
무게로 인해 몸에 무리를 주고 활동을 제한하며 심리적인 위축을 가한다.
멍에는 보다 구체적인 구속을 표현하는데,
이것은 아예 짐승―특히 소―을 통제하는 도구다.
멍에는 주인과 가축, 또는 노예의 관계를 명확히 한다.
주인이 멍에를 메게 하고, 멍에를 멘 자는 그가 섬겨야 할 주인이 있는 자다.
멍에는 주인의 지시와 뜻을 따르도록 통제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짐은 혹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일 경우가 많으므로
언제나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남의 짐을 져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쓸 것을 내가 운반하는 것이니
힘은 들어도 억울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멍에는 전적으로 부정적인 뜻으로만 쓰인다.
그것은 내게 필요한, 내가 자발적으로 메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주종, 종속, 지배관계를 전제하며 명시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단어를 거침없이 쓰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속여서 어떻게든 매상을 올리려는 약장수가 아니다.
그렇다면 짐이나, 특히 멍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말씀만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넘어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는 말씀을 덧붙인다.
여기서 “쉽고”와 “가벼움”이 핵심어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은 ‘너희 짐과 멍에를 쉽고 가볍게 해주겠다’고 하지 않으시고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굳이 “멍에”와 “짐”을 언급하신다.
예수님은 복음을 헐값으로 팔지 않으신다.

예수님을 믿는 것,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우선 지금까지 짊어지고 있는 짐과 메고 있는 멍에를 제거하게 해준다.
그것은 죄의 짐과 멍에로부터의 해방이다.
죄로부터, 짐과 멍에로부터의 해방, 그것은 자유인가?
아직 아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사람들을 얽매고 있던 주종관계, 종속관계, 지배·피지배관계를
분명히 청산해주신다.
우리를 해방시키며 죄의 짐과 멍에로부터 자유롭게 하신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복음은 주종관계의 해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주종관계를 고치는 데에 그 본질이 있다.
복음은 인간과 세상을 주인 없는 자,
또는 자신이 주인인 자―세상에서는 이것을 가장 바란다―로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지 않는다.
복음은 잘못된 주종관계를 바른 주종관계로 바꾼다.
악한 주인의 지배에서 선한 주인과의 교제로 바꾼다.
주인을 바꾸는 것이지 없애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그토록 싫어하고 거부하는 ‘자연주의’
―모든 것을 자연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모든 것을 자연으로 환원하는―는
주인을 없애고 자신이 주인이 되는 해방과 자유를 주장하지만
실제로 자연에서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자신보다 더 상위의 권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종속되지 않는― 자가 없다.
자연 안에서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 자체로서 자유로운 존재는 없다.
그러므로 주인을 없애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주인 아래에 있을 것인가가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새로운 짐이요, 새로운 멍에다.
아니 예수님은 우리의 새로운 주인이시다.
아니, 원주인이시다.
복음은 짐과 멍에로부터의 해방과 자유가 아니라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을 본질로 한다.
예수님은 진리이시고(“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진리가 자유를 주므로(“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님이, 예수님만이 자유를 주시며, 자유롭게 하신다.
즉 예수를 주인으로 모실 때에만 자유가 있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예수라는 멍에, 예수의 멍에를 메야 한다.
올바를 주종관계가 수립될 때에만 자유가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멍에”라는 단어를 감추지 않으시고,
사실 그대로 말하신다.
여기서 “멍에”라는 단어 때문에 거부감을 갖는 자는 참으로 어리석은 자다.
그들은 예수의 권능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는 이다.
멍에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자신은 아무 멍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의 멍에’에서 예수라는 새 주인을 보는 자는
참으로 자유를 얻고 구원을 얻고 참으로 복된 자다.
그러므로 나는 결단하고 고백한다.
예수님, 오 주님!
내가 주님의 멍에를 메겠나이다.
나를 주님의 소유로 삼으소서.
내 어깨에 주님의 멍에를 메어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