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9:13-21, 1/3의 죽음, 회개하지 않는 나머지)

여섯째 천사의 나팔은 또 다른 재앙의 시작을 알린다.
이것도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말 이만 만(이억) 마리와 기병으로 구성된 마병대에 의해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한다.
이들을 죽이는 일은 말이 가진 “힘”에 의한 것이었다.
“말들의 힘은 입과 꼬리”에 있었는데
그 입에서 “세 재앙” 곧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와 그들을 죽이고,
뱀 같이 생긴 꼬리에 달린 머리가 사람들을 해하였다.
다섯째 나팔의 “황충의 해”와 같이
그 모양이나 재앙의 내용이 처참하다.
“황충의 해”가 얼마나 사람들을 괴롭게 하였는지
그들이 죽기를 구했다고 했다.
그러나 황충의 목적은 고통에 있었지
그들을 죽이는 것은 아니었다.
아, 그것은 고통의 감면이 아니라 사실은 고통 자체다.
너무 괴로워 죽고 싶지만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라고 예고되어 있다.
그런데 이제 여섯째 재앙의 사자인 말들은
그들 가운데 1/3을 죽인다.
재앙의 핵심은 고통과 죽음이다.
아,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한 자들이 행했던
바로 그 무기 아닌가!
그리고 이제 그들이 이 두 가지를 당한다.

여섯째 나팔과 함께 시작되는 재앙에는
특별한 장소가 언급된다.
바로 “큰 강 유브라데”다.
전에 결박되었던 네 천사가 거기에 놓이는데
그들이 이 “사람 삼분의 일”의 죽임을 위해 준비된 자들이다.
“유브라데”가 어디인가?
바벨론을 흐르는 “큰 강”이다.
티그리스 강과 함께 이 지역을 비옥하게 만들고
세계 최초로 농업이 시작되게 한 젖줄, 유브라데 강.
그곳이 사람들의 피로 얼룩지고 시체들이 뒹구는
비극의 현장이 될 것이다.
가장 비옥했고 가장 강대했던 문명의 땅을 하나님께서 치신다.

그리고 여기서 또 시편 137편이 기억된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가 곧 유브라데 강이다.
거기서 유다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야 수모를 당했다.
그것은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70년의 유배 중에
회개를 통해 새로운 언약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었고
그 기적이 이루어졌다!
그때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던 유다 백성들은
무엇을 한 것인가?
단지 과거를 그리워하는 회상?
나라 빼앗긴 자의 애환과 분노?
그러나 그 본질은 회개였다.
이들은 회개하도록 바벨론에 끌려간 것이었다.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의 여러 강변, 바로 유브라데 강가에서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장차” 역전이 벌어진다.
유브라데 강가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회개한 자들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 천상의 하나님 보좌 앞에서 영광 가운데 있고,
이들을 박해했던 자들의 후손은
여전히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이제 바로 그 유브라데 강가에서
“이만 만”마리의 말들의 입과 꼬리에서 나오는 “힘”으로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그들은 1/3이 죽도록 되어 있으므로
2/3는 용케 살아남을 것이지만,
아! 그들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는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 우상” 숭배에 전념한다.
그들의 죄악, 즉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 하였다.

이 남은 자들을 위해 예비된 고통은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일까?
재앙은 점점 더 악화되고 심화된다.
처음에는 땅과 바다와 강과 해·달·별들의 1/3이 재앙에 직면하더니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직접 고통을 당하는 재앙이 닥친다.
황충의 해가 그들을 극악한 상태로 고통스럽게 했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 1/3이 죽임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회개하지 않은 나머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더욱 큰 고통, 더욱 심한 괴로움, 더욱 강력한 아픔.
그것들을 당할 대로 당한 뒤에 그보다 더 고통스럽게 죽임을 당한다.

이것은 “장차 될 일”이고
하나님을 끝까지 거부하는 악한 자들이 당할 일이어서
아, 내게는 안심이 된다.
그러나 이 재앙의 본질인 죄와 회개,
이것은 지금 나에게도, 모든 사람에게도 가장 중요한 문제다.
죄를 짓지 않는 거룩한 삶,
그리고 지은 죄를 바로 회개하는 겸손한 삶.
이것에서 넘어지기가 얼마나 쉬운가.
여전히 제동 없이 죄를 짓다가 나중에야 겨우 멈추는 것,
즉시 회개하지 못하고
계속 죄를 즐기거나 화와 분노의 관성에서 오래 벗어나지 못하고
그에 방치되는 것.
이러한 모습이 내게서 얼마나 경계되고 고쳐져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