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7:1-17, 구원하심이 어린 양에게 있도다)

“이 일 후에” 즉 주께서 여섯째 인을 떼신 후에
그러나 아직 일곱째 인의 개봉 전에,
아주 중요한 말씀이 들린다.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일이 닥칠 것인데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확보하기까지 지연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이요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해놓으신 표시―“이마에 인”―를 가지고 있다.
그 “수”에 사람들이 현혹되고 이단이 등장하는 배경이 되지만
참으로 감사하게도 성경은 그런 빌미를 주지 않는다.
구원받는 “하나님의 종들”은
“이스라엘 자손” “십사만 사천”으로 언급되지만,
바로 다음에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이를 더 명확히 설명한다.
우선 그들은 이스라엘의 혈통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표현하는 대표 단어이듯이
144000은 결국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상징이다.

“수”와 관련하여 중요한 것은 오로지 ‘많다’는 사실이다.
물론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인간들 가운데 소수일 것이지만
그 수를 합하면 어마어마하게 많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모든 시대에,
환난이 특히 심하였던 시대에도 보호하신 것이다!
“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어떤 자인가 하는 사실이다.
이들은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흰 옷 입은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린 양을 ‘예배’하고 있다.
그들이 “큰 소리로 외쳐” 이르는 말은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라는 찬양이다.
그리고 “모든 천사”가 화답한다.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 찬송과 예배의 장면은
하나님의 백성의 수가 다 찬 뒤에 천상의 하나님 보좌 앞에서 전개될 광경이다.
그렇다!
그때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이 찬양을 할 것이다.
그들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자들이다.

그 전체의 “수”가 모여 드리는 예배는
오늘 본문의 천상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현재, 지상에서의 예배의 본질이기도 하다.
예배는 바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라고
선언하고 찬송하고 경배하는 것이다.
이 고백과 찬양이 영원히 하나님과 예수께 드릴 예배의 본질이다.

많은 사람이 어떤 상황을
인간의 이상적 모습, 또는 완성된 상태로 설정하고
그것을 ‘구원’―자아성취―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자기수양, 자연과의 합일, 만족함, 평안함, 평화적 관계 등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아주 주관적이어서
각자의 수준에서 얼마든지 그것을 누리고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예수님과 무관하다.
그들의 구원은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지 않다.

이와는 다른 현상으로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다고 하는 기독교 안에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으로는 부족한 자들이 꽤 있(었)다.
그들은 믿음 외에 무엇을 더해야 “구원하심”이 만족되리라 생각했다.
고행과 선행과 종교라는 형식, 율법 또는 신비한 기적, 이게 더 있어야 했다.
이들의 구원도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밝히 계시하시는 진실은, 진리는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고백하고 선언하는 자가
“인침을 받은” “이스라엘”이요 “흰 옷 입은 자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예배는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언제나 이것이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나님의 백성은 땅에서 다른 예배를 드리다가
하늘에 올라가서 이 찬송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는 어디서나 ―교회에서나, 골방에서나, 성경묵상과 기도에서나,
일상의 생활과 일터의 현장에서나― 이 예배를 드린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