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9:13-24, 나의 내장과 형체와 형질)

앞에서 다윗은 ‘나를 아시는 하나님’,
‘모든 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 시에서 말하는 나는 총합적인 전체로서의 나일 것이다.
내 영혼만을 말하거나 육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나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시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시는’
나는 내 속의 의도와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와
내 몸의 기관들이 하는 동작들 모두가 포함된다.
내가 어디 있든 하나님께서 ‘계시는’ 그 모든 곳도
지상의 공간뿐 아니라
나의 영혼이 때로 방황하고 때로 고양되는 그 모든 상태를 다 망라한다.

오늘 말씀은 다분히 나의 몸과 관련하여 직접적인 언급이 많다.
내 육신의 출생과정이 자세히 묘사되고
심지어는 “내 내장”과 같이 아주 구체적인 부위까지 표현된다.
“나의 형체”도 “내 형질”도 다 물리적인 나의 구성요소,
또는 완성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께서 지으셨으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나는 그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위해 움직인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 모든 신체 부위들은
나의 전체, 즉 영혼까지 관련되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노래다.
특히 “내장”이라는 단어는
사람의 ‘마음’을 상징하기도 한다고 했다.
어떤 학자는 이와 똑같은 맥락에서
‘마음’을 ‘오장육부’로 표현하여 우리의 몸이 영혼과 분리되지 않고
함께 전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제임스 스미스)
어떻게 우리가 영혼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겠는가.
하나님이 그 “보배로우신” “주의 생각”으로 “심히 기묘하”게
―옛 번역으로는 ‘신묘막측’하게―
창조하신 나의 오장육부를 소홀히하며
마치 신앙과 무관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모든 죄는 마음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몸과 함께 구체화된다.
나는 영혼으로만 죄인이 아니다.
나의 몸이 죄의 도구다.
그리하여 나는 영혼과 몸을 다 구원받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에서 내가 영혼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변화된 몸과 역시 새롭게 변화된 영혼의 결합 속에,
즉 지금 여기 지상에서 ‘나’라는 정체성이 그대로 연속되는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실체 아닌가!
그러므로 나는 나의 “내장”과 나의 “형체”와 나의 “형질”을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것을 지금 어떻게 하나님께 드리며 살까,
그것으로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시게 할까,
이것이 나의 온통 생각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시는 나와 하나님과의 은밀한 관계만 노래하지 않는다.
이 시를 맺는 마지막 단락은
하나님의 공의를 고백하고 찬양하고 간구한다.
“악인”, “주의 원수”, “주를 미워하는 자”에 대한 탄식은
곧 세상 현실에 대한 성도의 책임감이다.
이 시는 시종 “나”를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세상 속의 나며, 공동체 가운데 나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공의가 어찌 사적이겠는가.
그것은 당연히 ‘공공성’(公共性)을 전제한다.
이 시에서 “나”는 곧 ‘우리’다.
하나님이 아시고 거기에 계시고 지으신 대상은 “나”이면서 ‘우리’다.
나는 하나님과의 은밀한 관계에만 집중하기 참 쉽다.
나는 공동체와 이 세상을 가능하면 벗어나 하나님께만 안기려 한다.
그것은 시인이 괴로워하는 이 세상의 악한 현실에 대한 기피요 무책임이다.
다윗은 “주의 원수들”,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니이다”이라고 고백하며 선언한다.
나도 그렇게 하는가?
다윗은 “그들을 심히 미워”했다.
하나님의 공의의 기준과 감각으로 세상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똑같이 그렇게 비추었다.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소서!
하나님의 공의, 즉 사회적인, 공적인 차원으로 믿음을 확장하는 일은
판단과 정죄로만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는 현실 사회와 나를 동일하게 비추며,
세상과 똑같은 나를 판단하게 하며
세상과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한다.

그러한 책임을 위해서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