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7:1-9, 어찌 잊을까)

어쩌면 시편의 모든 시 가운데 문학적으로 가장 뛰어날 이 시는,
그보다 내용과 배경이 너무도 애절하고 처참하고 결연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앙의 정수를 보여준다.

유다가 멸망했다.
그것은 유다 백성이 한결같이 죄를 짓다가
하나님의 무수한 경고와 간곡한 권고를 무시한 마땅한 결과였다.
끝까지 하나님을 거역한 자들은 유다에서 이미 멸절되었고
아마도 하나님께서 정해진 때에 다시 불러서
새 백성으로 세우실 후보들을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게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징벌이므로 이 고통을 달게 받아야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불평과 원망을 하지 않고
그동안의 죄를 회개하며 새 세대를 준비하는 일이다.
그 안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이제 온전히 사모하는 것이 포함된다.
유다가 그렇게 죄에서 떠나지 못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알려고 하지 않았고
그것을 경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벌을 달게 받는 것은
포로로서 온갖 수모를 기꺼이 당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대한 모욕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분명 바벨론이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선택된 도구이지만
그들 자신이 그러한 의식이 전혀 없는 채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때 시인은 하나님께 나아간다.
하나님께 고한다.
하나님께 모든 슬픔과 분개를 토해낸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를 호소한다.

그것은 나를 살려주세요 하는 간구가 아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잊지 마시고
공의로 다스려달라는 간구다.
그것은 시편에 자주 나오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즐겨 “자기를 위하여”, “자기 이름을 위하여” 하셨듯이― 하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나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나의 편함을 위해, 사적인 보복을 위해―가 아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다.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서다.

하나님의 공의의 핵심은 “기억”이다.
세상에서 공의가 시행되지 않는 첫 이유는
“기억”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불의와 죄를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린다.
오늘 본문에는 “기억”과 관련된 단어가 자주 나온다.
시인은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고,
예루살렘을 잊지 않으며,
그곳을 “기억”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불의한 나라들을 “기억”하시기를 간구한다.

시인이 바벨론의 여러 강변에서 당하는 일은
포로로서의 신체적인 인격적인 굴욕과 고통만이 아니다.
그들은 유다 백성에게 최악의 괴로움을 가하면서
가지고 노는 방법을 고안했는데
바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승자로서의 천박하고 방탕한 쾌락을 위해
하나님을 노리개로 삼으려 한다.
그리하여 포로로 끌려온 시인은 자신의 “기억”에 촉구하며,
하나님의 “기억”에 호소한다.
나의 “기억”아 이것을 잊지 말라!
하나님이시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사람의 기억은 한계가 있고 하나님의 기억이 절대적이지만,
성도로서는 이 두 가지가 다 중요하다.
성도는 하나님의 공의를 위해 세상의 불의를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간구하고 호소할 수 있으며,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간절히 바랄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보시고 판단하시고 기억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도록 간구하고 호소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이 다 아시지 않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억하소서 하고 부르짖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억하심을 내가 잊지 않기를 촉구하는 것이다.
즉 나는 불의를, 하나님을 향한 세상의 참람한 모독을 기억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기억하시고 공의롭게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무엇을 기억하는가?
내가 행한 일 가운데 칭찬받고 상급을 받을 일들?
내가 주고 아직 돌려받지 못한 것들?
나를 칭찬하지 않은 자들의 이름을?
내게 갚지 않은 자들의 얼굴을?
내 기분을 상하게 한 자들, 나를 창피하게 한 이들을?
아, 그런 것을 어찌 잊을까!
나의 기억력은 주로 이런 쪽으로 발달하지 않았는가!
이것이 문제다.
이 기억 안에 과연 하나님의 공의가 얼마나 중심에 있는가?
나의 판단과 감수성이 얼마나 더욱 하나님 중심이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