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6:16-26,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하나님)

어제 말씀에 이어 출애굽 이후의 역사가 감사의 내용이다.
그 일들로 인해 하나님의 영원하신 인자하심을 찬양한다.
어제 말씀은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 사건까지였다.
즉 오늘 말씀은 그 이후로 광야 생활부터 시작한다.
이 기간은 출애굽 1세대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 값을 치른 시기다.
그 수는 현저히 줄었겠지만 가나안에 진입하기 전까지 1세대가 살아 있었다.
이 시의 후반부에 언급되는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서도 기억해주신 이에게 감사하라”는 말씀은
바로 1세대가 생존했던 기간에 딱 맞는 내용이다.
당연히 인간의 어느 시대라도 우리는 “비천한 가운데” 살았다.
그것은 경제적인 궁핍, 정치적인 불안, 사회적인 갈등 때문이 아니다.
그 비천함의 원인은 바로 죄다.
어느 세대의 인간도 죄와 무관하지 않고 죄로 인해 “비천”하다.
인생 중에 누가 고귀하겠는가!

그런데 이제 그 비천함에서 면하게 된 자들이 있다.
정말로 고귀하게 된 자가 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 곧 성도들!
그들은 하나님과 무관했던 비천한 자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로 죄인도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비천한 자가 아니다.
고귀한 딸과 아들이다.

그러나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서도 기억해주신 이에게 감사하라”는 말씀은
사실은 예수를 믿는 이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예수 믿기 전, 또는 출애굽 직후 광야 40년 기간 동안만 비천하지 않았다.
그 이후도, 즉 가나안의 정복 과정에서도,
그리고 성도로서 사는 중에도 우리는 여전히 비천하다.
여전히 죄를 짓고 죄와 싸우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은 예수님을 믿은 뒤에도 죄로 인해 비천하다.

그러나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서도 기억해주신”다.
그것은 죄의 용서(사유)하심으로,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심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은혜가 여전히 죄 가운데 허덕이고 있는 우리를,
계속해서 비천한 가운데 있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계속 먹이시고 죄를 용서하심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전히 비천한 자면서 고귀한 자다.
우리의 죄 때문에 그러하며,
하나님이 비천한 자를 “기억해 주신” 사실로 그러하다.
그러므로 내가 혹시 그 어떤 죄를 짓고 비천한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해 주신다.
하나님이 나를 기억해 주셨는데
내가 어찌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