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5:1-14, 울지 말라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하늘에 열린 문”으로 들어간 요한은
“보좌”와 “그 보좌에 앉으신 이”를 보았다.
그리고 그분의 오른손에 안팎으로 가득 써진 “두루마리”가
“일곱 인으로 봉”하여져 있었다.
그러나 그 두루마리를 펴볼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절망적인 소리를 듣는다.
요한은 그 말에 “크게 울었”다.

어제 본문에서
네 생물이 “밤낮 쉬지 않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하고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리고 있었으니,
하늘의 예배가 계속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 예배의 자리에서 요한은 크게 운다.
그 두루마리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오른손에” 들린 아주 귀한 책일 터인데,
일곱 겹으로 인봉되어 그 안팎에 가득 써진 글들을 전혀 읽을 수 없다.
요한은 이 책과 글의 그 중요한 내용을 전혀 알 수 없어 운다.
하나님께서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하시는 간절한 마음과 같이,
요한은 그것을 보고 들으려는, 그것을 알려는 마음으로 간절하다.
내게는 참으로 이러한 간절한 사모가 없구나!
하나님께서 보여주신다고 하는데도
그것을 알려고 하는 간곡한 열정이 내게 얼마나 있는가.

이때 요한에게 참으로 희망적인 답이 들렸다.
그 일곱 개의 인봉을 떼고 그 책을 펴서 볼 자가 있다!
그는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다.
그리고 그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의 그 일곱 인을 떼”실 것이다!
그가 누구인지는 이미 충분히 알려주었다.
바로 “일찍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가 “어린 양”이라고 이미 세례 요한이 소개했고
그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분만이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신 이유는
그가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 피는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게 하는
그 합당한 근거가 되었다.
이 세상에 어느 시대 어디서나 그 누구도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이 되기에 합당하지 않다.
누가 그 자격이 있겠는가.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죄인들을 정결케 함으로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는 기적이 베풀어진다.
예수께서 자기 “피로” 백성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는 일을 그가 했다.
하나님께 드린다 함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죄 대로 처분하도록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께 정결하게 드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들이 땅에서 왕노릇” 할 것이다.
이 은혜를 입은 자들이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
그것이 천상의 예배다.
그리고 지상에서의 예배에서도 바로 그것이 핵심이다.

요한은 이 예배에서 처음에 울었지만
그 다음에 전혀 울 이유가 없게 되었다.
아, 이것이 예배다.
하나님 앞에서 답답함을 호소하고 통곡하는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로 위로 받고
그것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것.

아, 하나님은 결국 요한의 눈물을 닦아 주신 것이다.
그의 울음을 그치게 해주신 것이다.
울음만 그친 것인가?
그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을 하셨는지를
“모든 피조물”의 찬송에서 듣고 보았다.
울음이 감사와 기쁨으로 바뀐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아, 이러한 예배를 내가 얼마나 사모하고 있는가,
나는 참 부끄럽다.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께 집중하여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형식적으로 되기가 일쑤며,
그보다 더하여서 사람들 판단하는 데 급급하기가 얼마나 쉬운가!
아, 참으로 불경한 예배다.
예배 안에 울음도 그 울음의 해소도
그리하여 기쁨도 없는 예배,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 이기신,
그 부활과 통치의 감격과 기대와 벅찬 감격이 없는 예배.
우리 주님이 내게서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합당”하게 받으시는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