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4:1-11, 하늘에 열린 문)

하나님께서 정말로 무엇인가를 “보이시려고” 작정하셨다.
두 가지가 다 중요하다.
‘무엇’을 보여주시려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정말로 ‘보여주시려는가’.
처음부터 이 두 가지를 다 말씀하셨다.
이 책의 맨 첫 절에서
하나님이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이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보여줄 무엇인가가 없다면
아무리 보여주려고 해도 아무 의미가 없다.
보여주겠다기에 잔뜩 기대하고 눈을 떴더니
아무 것도 없거나 별 신통치 않은 일이라면
그 기대는 무산된다.
또한 보기에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하여도
그것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아무 소용없는 일이다.
약만 오를 것이고, 반감을 갖고 누굴 놀리느냐고,
또는 아무 것도 보여줄 것도 없으면서 공연히 허세부리는 거라고
단박에 몰아붙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계시며,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려 한다.
그것은 그냥 희한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나와 모든 세상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것은 삶이냐 죽음이냐의 문제요,
더욱이 영원한 생명이냐 영원한 멸망이냐의 사안이다.
그것은 각 사람 하나하나의 문제요,
전 우주의 사안이다.

그것은 “이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이라고 했다.
요한이 “성령에 감동”되어 올라간 곳은 “하늘”이었고,
그 때는 “이후에 ··· 일어날 일”이라 하였으니 미래의 시점이다.
거기서 그는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그 앞에서의 경배와 찬양을 보았다.
그러나 이 천상의 예배는 영원한 ―아주 먼― 미래는 아닐 것이다.
‘피조물의 대표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네 생물의 찬양에
과거(“전에도 계셨고”)와 현재(“이제도 계시고”)와
미래(“장차 오실 이”)가 언급되는 것으로 봐서 그렇다.
즉 모든 것이 끝난 뒤의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인 미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요한이 하늘에서 본 이 거룩한 예배는
마지막에야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부터 현재와 영원한 미래까지 행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요한이 보는 것은 앞으로 “마땅히” 일어날 일들,
즉 반드시, 꼭 일어나야 하는 너무도 중요하고 위대하고 놀라운 일이다.
과연 하나님께서 이후에 무엇을 “마땅히” 행하시려는지를 안다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다 정확히 아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름에 가려진 오리무중의 ‘운명’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행하실 분명한 계획이 있으시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피조물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일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날
선하고 공의롭고 사랑 넘치고 거룩하고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에게는
무섭고 괴롭고 고통스럽고 죽음보다 더 처참한 최악의 일이다.
요한은 하늘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보았다.

요한이 본 그 ‘무엇’이 우선 놀랍지만,
더욱 놀랍고 감사한 것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셨다는 사실이다.
요한이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었다.
하나님이 이것을 보여주셨기에 요한이 보았다.
하늘 문이 열려 있었다.
그것은 들어오라는 뜻이다.
과연 “이리로 올라오라”는 음성이 들렸고
요한이 그리로 올라가 그 열린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요한을 초대하셨고 보여주셨다.
그리고 이것은 요한을 신비한 영적 거장으로 만드시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종들에게” 그것을 “보이시려고”
요한에게 “알게 하신 것”이다.
“그 종들”은 누구인가?
바로 예수를 믿는 자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는 자다.
이들이 바로 요한이 볼 하늘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자들이다.
바로 ‘오늘’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다!
그리고 바로 나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것을 “보이시려고”
요한을 하늘로 초대하셨고
그가 들어와 보도록 하늘 문을 열어 놓으셨다!
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나님께서 나를, 이 미천하고 더럽고 부족한 나를
하늘의 열린 문으로 들어오라고
“이리로 올라오라”고 초대하신다.
그리고 하늘의 거룩한 예배를 보게 하신다.
내가 이것을 보는 것을 어찌 마다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