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3:14-22, “아노니”와 “알지 못하는도다”)

일곱 교회 가운데 마지막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주님의 말씀!
어제 본문에 이어 오늘도 주께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고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다.(시편 139)

주님은 각각의 교회와, 세상의 모든 사람 하나하나,
그들의 모든 속사정과 심중의 의도를 낱낱이 아신다.
그리하여 각자에게 맞는 말씀을 하신다.
일곱 교회에게 ―본인들은 잘 알지 못해도―
주님이 그들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
무엇을 잘 했으며, 무엇이 문제인지 다 말씀하신다.

주께서 다 아시고 하시는 말씀 가운데는,
사람이 다 알지 못하므로 잘못 판단하는 것의 실상도 당연히 포함된다.
서머나 교회가 “환난과 궁핍” 가운데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그것은 본인들이나 누가 보아도 결핍이요 빈핍한 상태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은
그들이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신다.
환난과 궁핍은 현상이고 부요함이 실상이다.
이것은 참으로 감사한 실상이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사데 교회는 그들이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는 살았다는 자각이 환상에 불과한 것이요
실상은 죽음이다.
주님이 아시는 것이 곧 실상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차원도 이와 같은 맥락이지만 더 심각하다.
그들은 실상을 “알지 못하는” 것을 책망 받는다.
그것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의 결과다.
또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 알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라오디게아 교회는“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한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한 것을
알지 못한다.

예수님은 이 책망이 사랑에서 나오는 것임을 강조하신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라”
이와 똑같은 말씀이 이를 더 분명하게 밝힌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브리서 12:6-8)

주님의 사랑 → 징계 → 회개로 이어져야 한다.
주님의 징계가 사랑인 것은 회개에 이르게 하고
그리하여 죄로부터 정결하게 되고 용서를 받기 때문이다.
거룩함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주시기 위해
주께서 사랑하는 자들을 징계하시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앞부분에서 가장 귀에 익은 말씀인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는 구절은
바로 이 사랑과 책망과 징계와 회개의 말씀에 바로 이어져 있다.
그러면 두 말씀을 연속으로 볼 때에
예수께서 문을 두드리시는 것은 “책망”과,
문을 여는 것은 “회개”와 통한다.
―물론 전도할 때 흔히 인용하듯이
주께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사랑에 초대하시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연인, 부부의 연합으로 보아도 전적으로 맞다―
그러나 또한 본문의 문맥에서는
책망(징계)과 회개와 유비해도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책망에 마음의 문을 열기 어렵다.
아, 누가 책망을 듣고 싶겠는가!
모두 다 칭찬하고 인정하고 잘한다고 추켜세우는 것을 듣고 싶어 한다.
그러나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는 주님께
나는 “책망”받을 것투성이다!
주님이 깐깐하고 고약하고 완고해서가 아니다.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생각을 갖지 않고,
그런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좋고 옳기 때문이다.
내가 중단하지 않는 그런 생각과 그런 행위가
결국 나를 파멸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그것을 막으시는데
바로 “책망”과 “징계”를 통해서다.
그러니 “책망”을 듣는 것은 복이다!
내가 그 책망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연다면 내게는 복이다.
그것이 바로 “회개”다.

아, 나는 또 고백해야 하는데,
주께서 나를 책망하실 때 많은 경우에
사람의 “음성”을 통해서 그것을 하시는 것 같다.
내가 듣는 모든 싫은 소리는
사실 거의 다 주님의 책망의 음성이다!
그 말이 옳기 때문이다.
혹시 주께서 내게 직접 말씀하시면
내가 잘 듣고 바로 회개하겠지만,
사람이 하는 말이면 그의 말이 주관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그 권위를 부인하고 듣기를 거부하겠다면,
아, 사람아,
그렇다면 주님의 면전에서도 책망에 회개하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구의 말이든 책망을 달게 들어야
주님의 책망에 마음 문을 열 수 ―회개할 수― 있다.
그렇게 잘 하지 않는 나에게 다시 한 번 하는 호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