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3:1-13, 네 행위를 아노니)

일곱 교회에 대한 편지는 언제나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 자신이 누구신지를 선언하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예수께서 각 교회를 아신다는 말씀이 이어진다.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아시며,
서머나 교회의 환난과 궁핍과 비방 받는 것을 아시고,
버가모 교회가 어디에 사는지 아신다.
그리고 두아디라 교회의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시고,
사데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의 행위를 아신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이 말씀이 마지막 세 교회에 동일하게 반복된다.
이 내용은 사실 모든 교회에 적용된다.
“행위”의 구체적인 면모에는 차이가 있어도
주님께서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아신다는 사실에서는 모두 동일하다.

오늘 본문의 두 교회,
사데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에 공통적인 말씀인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를 바로 이어지는 그 다음 구절과 연결하면
그 뜻이 분명할 것 같다.

사데 교회는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이것이 예수님이 아시는 이 교회의 “행위”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이것이 예수께서 아시는 이 교회의 “행위”다.
이 “행위”가 음행이나 거짓말,
또는 환난의 인내나 복음 전파 등의 구체적인 행위를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나,
이 두 교회의 전반적인 성향과 성격을 뜻하는 것 같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께서 아시는 두 교회의 각각 다른 두 “행위”는
각 교회의 부분적인 면이라기보다는
전체적인 상태를 지칭하는 선언적 판단이다.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
약한 것으로 보여도 강건한 행위.
둘 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속의 실제가 서로 다르다.
그리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겉에 있지 않고 속에 있고,
일시적인 것에 있지 않고 지속되는 것에 있다.
당연히 사람들은 어떻게 보이느냐에 연연하고,
진실로 그것이 무엇이냐, 어떠하냐에는 훨씬 둔감하다.

여기서 구분될 “행위”는
특정 행동의 종류에 의해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가령 직장생활은 겉과 보이는 면이고,
가정생활은 속과 보이지 않는 면이어서
전자보다 후자가 더 한 사람의 진면모를 의미한다고는 할 수 없다.
어느 영역이든 위선은 나쁜 것이며
이중적인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밖에서든 집안에서든 교회에서든 골방에서든
어디서나 가능하다.
어떤 것은 영적이고 어떤 것은 세상적인가?
기도는 영적이며 취미생활은 세속적인가?
바리새인의 기도는 위선적이었고,
초목과 동물들에 대해 세밀하게 많이 알 수 있는 바탕이 되었을
솔로몬의 취미생활은 창세기 1장 28절의 순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 네 행위를 아신다고 할 때
그것이 소설을 읽은 것과 성경을 읽은 것을 구분하신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떤 동기와 목적과 방법과,
그 과정에서 무엇이 열망되며 어떤 습관이 형성되는지를
아신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 무엇인지,
나를 약하지 않고 강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나의 행위를 아시는 주님의 눈으로 판단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