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2:8-17, 환난과 궁핍으로 부요케 하시는 주님)

이 책은 사도 요한이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 것이다.
요한이 본 것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의 모습이다.
그가 보는 모든 일들―“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도
모두 예수께서 지금과 장차, 즉 영원히 행하시는 일들이다.
물론 그 가운데 마귀의 대적이 있고
성도의 “환난과 궁핍”이 일어나고 있지만,
모든 것은 세상을 주관하시는 주님의 주권 안에 있으며,
결국 드러나는 것은 주께서 행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요,
이 책의 묵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혹시 세세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분명하지 않은가.

서머나 교회와 버가모 교회,
두 교회에서 공통적으로 계시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가 당하고 있는 “환난과 궁핍”을 다 아신다.
그러나 이 교회의 교인들을 핍절하고 불쌍한 자로 여기시지 않는다.
세상은 그럴 것이다.
서머나 교인 본인도 그렇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환난과 궁핍” 가운데 있는 성도를
“부요한 자”라고 하신다.
세상이 말하는 핍절하고 불쌍한 자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부요한 자,
어떤 것이 맞는 답인지는 너무도 분명하다.
세상은 겉만 볼 뿐이요 예수님은 본질을, 진실을 보신다.
주님이 규정하시는 것이 “실상”, 곧 진리다.

버가모 교회에도 그러한 자가 있다.
안디바는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한 자다.
그것은 분명 “환난이요 궁핍”이다.
그러나 그는 그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예수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주님은 그를 “내 충성된 증인”이라고 부르신다.
그는 “부요한 자”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에는 그와 반대편에 있는 무리가 있다.
그들은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
곧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다.
그들이 성도를 가만 내버려 두겠는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 의한 “환난과 궁핍”보다
이단들에 의한 것이 더 악하고 심하다.
그것이 더욱 고통스럽다.
그러므로 그것을 “이기는 그에게는”
주께서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것이다.

즉 “환난과 궁핍”을 당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이미 “부요한 자”는 아니다.
그것을 “이기는 자”가 그러하다.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나
“죽도록 충성”하는 자가 “이기는 자”요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다.
그러므로 그는 “부요한 자”다.
그리고 이 일은 예수께서 그저 “환난과 궁핍”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뒷짐 지고 관망하면서 1등으로 선착하는 자만 골라서 상을 주는 시합이 아니다.
성령께서 “환난과 궁핍”을 당하는 성도를 감화하시며
견디게 하시고 이기게 하신다.
주께서 성도와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환난과 궁핍”을 당하는 자는
“실상은” “부요한 자”다.

아, 나는 “환난과 궁핍”의 시대에 살아오지는 않았다.
참으로 감사하다!
그 근본이 예수 믿는 믿음을 박해한
식민지 시대와 공산주의의 “환난과 궁핍”을 겪지 않았다.
그러나 “장차” “십 일 동안”의 “환난”이 언제 올지 어떻게 올지는 모른다.
아, 나의 연약한 믿음으로는
그 이전에 하늘 나라로 갈 수 있다면 좋지만,
어떤 상황일지라도 “죽도록 충성하는” “충성된 증인”이 되기를
참으로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더욱 간구한다.
그리고 나의 일상에서
그 작은, 아주 조그만 일들 가운데
약간의 불편함만 있어도, 예상과 다른 ‘수 틀리는’ 일만 벌어져도
후회할 일을 너무도 쉽게 하는 나를 볼 때에,
내가 이 말씀을 명심하고
참으로 “충성된” 자로 요동하지 않고,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부요한 자”의 든든함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