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2:1-18, 여기 거주하시는 하나님)

성전에 올라갈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신다는 사실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곳으로 가면서 성전에 간다고 하고,
특별한 노래를 부른들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아,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은 사실 없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안 계신 곳이 없는 하나님―
그러나 내가 죄를 지을 때 그 현장에서 다 보고 계시고 아시지만
나의 죄에 동참하지 않으신다,
나와 그 일에 동행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재와 마찬가지다.

또는 하나님이 계신 성전에 올라가는 중이라도
내가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행위를 노래하고 있다면
그것도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서 부적합하다.
나는 성전에 올라가면서 거기에 가고 있는 내가 아니라
거기에 계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내가 노래 중에 나를 읊을 것은
오로지 죄의 고백이며 그에 대한 분개다.
내 노래에서 높이 되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는 그러므로 겸손한 노래다.
이 시가 다윗을 기억하는 것은 바로 “그의 모든 겸손”이다.
하나님이 계신 그곳만이 그의 목적지였다.
아, 분명 다윗의 겸손은 그가 큰 죄를 짓고 회개한 뒤를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도 한번은 하나님이 계신 곳에 이르지 않고
자기 장막 집에 들어가 침상에 올라 죄를 범한 적이 있었다.
백성들은 이방의 적과 싸우고 있는데 ―그때 하나님은 거기 계셨다!―
그는 예루살렘에 머물러 저녁이 되어 일어나
목욕하는 여인을 탐하여 자기 장막 집, 자기 침상으로 불러들여 ―분명 왕의 명령으로―
그 짓을 했다.
그러나 그는 낮아질 대로 낮아지는 회개를 했고
더 이상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겸손했다.
회개만큼 겸손한 일이 인간에게 있을까.

결국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서 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전장에 백성들과 함께 계신데 예루살렘에 있은들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며
성전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신가가 가장 중요하며,
하나님이 계신 그곳으로 나아가는 것이 곳 성전에 올라가는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성전의 건축을 허락하시고
그것을 위해 준비하게 하시며
그의 아들이 건축하게 하셨던 장면을 기억한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여기 거주할” 때에만
“여기”가 성전이 된다는 뜻이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여기”에 거주하지 않으시는데
내가 여기를 아무리 신성하게 여긴들
그것은 ‘마당만 밟는 종교놀음’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 그곳이 성전이다.
죄의 현장은 성전이 될 수 없다.
어제 말씀처럼 아무리 종교적인 행위여도
교만하고 오만함으로, 즉 자기를 높이기 위해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는 그 자리는
성전이 아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리에 계신다.
아니, 하나님이 계신 곳에 겸손한 자만 거기 함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