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22:21-34,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시나니)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인간의 연약함으로 죄가 없이도 이해 부족으로 인한 곤란한 상황은 늘 발생한다.
그러므로 문제 자체보다 그 문제의 해결이 더 중요하다.
그것이 분명한 죄라면 회개나 징계 등의 마땅한 처리가 따라야 할 것이다.
의사소통에서 발생한 오해의 문제라면 정확한 소통으로 다시 돌아가서 해결해야 한다.
요단 저편의 두 지파 반이 제단을 쌓았다는 소문이 야기한 갈등은
거의 내전을 야기할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문제는
자초지종을 파악하기 위한 양측의 대화로 범죄의 여부가 밝혀지고
그에 따라 오해의 여부도 밝혀지고
아무 문제가 아니었음이 밝혀져 그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고 오해가 풀리며 더 하나가 되었다.

요단 이편(서쪽)의 지파들은 두 지판 반의 범죄에 대한 심증을 굳히고
그것을 그대로 전했다.
만일 이들이 심증만으로 바로 전쟁을 선포했다면
비극은 막기 어려웠을 것이다.
상대방의 범죄에 대해 아무리 확신을 했어도
자초지종을 알아보는, 상대방의 설명을 들어보는 과정은 참으로 중요하다.
다행히 그 과정이 있었다.

요단 이편의 지도자들이 이미 범죄로 단정하고 논리를 전개할 때
만일 두 지파 반이 그것을 억울한 누명으로 여겨
오해 받은 사실에만 문제를 삼고 매달린다면
분명 이 문제는 본질을 벗어나 말싸움이 되고
결국 전쟁도 불사할 상황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두 지파 반은 그러한 상황으로 미혹되지 않고
오해의 근원인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차분히 설명했다.
무엇이 진실인가가 중요하고 그것이 본질인데
그보다 오해 자체의 부수적인 사안으로 인해 불쾌해지고 기분이 상하고
그리하여 걷잡을 수 없이 돌이킬 수 없는 분란으로 가기가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두 지파 반은 자신들의 행동이 범죄와 결코 무관함을
하나님 앞에서의 결백함으로 증명하고자 한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을
자신들의 생명(구원)과 죽음(하나님의 벌)보다 더 중시했다.
자신이 살고 죽는 것보다 하나님의 진실이 더 중요했다.
그들은 요단 이편의 지도자들을 설득하려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에 몰두했다.
그것이 그들에게 중요했다.

그러나 그것은 말로써만 그럴싸하게 가장한 거짓말일 수도 있다.
인간은 극한적인 수사학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는 진실도 회피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말보다도 그것이 입증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두 지파 반은 그것까지 제대로 했다.
문제의 핵심은 다른 신을 향한 제단의 가능성과
그리하여 이스라엘에서 떨어져 나가려는 의도의 여부에 있었다.
그리하여 두 지파 반은 이것이 제단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든, “다른 제사”든―
그들이 이스라엘 전체에 속해있음을 보여주는
“증거”(표시) 역할을 하기 위함이라고 논증했고,
그 모양이 전혀 제단과 상관없음을 들어 그것을 입증했다.

비느하스 제사장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이 설명에 수긍을 했다.
그들은 자신의 확증에만 집중해서 애초에 단정했던 입장에서 물러나지 않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확신에 찬 판단을 그 반대의 설명과 대조하며 냉철하게 숙고했다.
그들에게 역시 중요한 것은 진실이었지,
자신의 생각의 관철이 아니었다.
오직 진실에만 마음을 여는 것,
그것이 문제 해결의 핵심이었다.

이 대표들은 두 지파 반의 설명을 듣고
자초지종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고했다.
그리하여 모든 진실을 모두 알게 되었다.
모두가 진실 앞에서 진실해졌다.
“그 일이 이스라엘 자손을 즐겁게 한지라”
자기주장의 관철이 아니라 진실이 기쁨을 준다.
이로써 내전을 불사할 전의는 눈 녹듯이 사라졌다.
전쟁은 쓸모없게 되었다.
전쟁으로 다스릴 범죄는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두 지파 반의 진실은
이스라엘을 하나의 신앙적 공동체 안에 견고히 세우려는 노력임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이 진실에 따라 이스라엘은 하나가 되었다.
참으로 감사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일어나면 얼마나 감사하고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