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22:10-20, 문제 해결을 위하여)

사람 사이에 문제는 늘 발생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문제는 인간이 짓는 죄와 관련이 된다.
무엇보다 죄를 행함으로 문제가 발생하며,
또는 죄가 아닌데도 죄로 오해하여 그를 단죄하는 죄가 문제를 낳는다.
적극적이고 고의적인 죄에 의하지 않은 문제들도 있다.
그것은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는 능력이 부족함과 관련된다.
특히 마음속의 의도를 정확히 알지 못하므로 다르게 상상하고 곡해하기도 한다.
이러한 불완전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문제를 같이 숙의하는 작업이다.
오늘 본문은 그 과정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을 마치고,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싸우기로 한 약속을 다 지킨 요단 동편의 두 지파 반을 고향으로 보낸다.
그것은 참으로 감사한 신실함이었다.
그들은 자기 생각만 하지 않고 다른 지파를 위해 목숨까지 담보로 하고
전쟁에 함께 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두 지파 반이 요단 언덕 가에 제단을 쌓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바로 이전의 기억들을 되뇌게 하였다.
아주 심각한 사건들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죄요, 이스라엘을 둘로 쪼개는 죄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이 실로에 모여 두 지파 반을 처단하러 갈 작정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들은 행동주의에만 빠져들지 않고
한 가지를 더 생각했다.
대표들을 보내어 자초지종을 알게 한 것이다.
설령 전쟁을 한다 해도 왜 싸우려는지 이유를 밝히고
그 과정에서 전쟁을 피할 길이 모색된다면
―진짜 죄를 지은 것이라면 회개에 이르게 함으로써―
참으로 다행이다.

비느하스와 각 지파의 대표들이 두 지파 반에게 가서
그들이 우려하는 범죄에 대해 논거를 밝혔다.
그들이 생각하는 두 지파 반의 문제를 설명한 것이다.
사실 그것은 무슨 일인지 먼저 묻고
두 지파 반의 답변을 듣는 식으로 진행되었어야 했다.
그들은 실제로 요단 동편의 지파들을 정죄했다.
그러나 이 조사가 설전을 넘어 싸움으로 치닫지 않은 것은
이들의 말의 태도가 도발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말의 내용이 이미 정죄를 전제하였어도
그 말의 태도가 부드럽다면, 대화가 가능한 말투라면,
즉 상대방의 해명을 들을 준비가 된 소통이라면
최악의 상황에 이르지는 않는다.
더구나 이 대표들은 진정으로 죄를 막기 위한 자기희생적 대안까지 제시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싸움을 목적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싸우고 싶어 안달나지 않았다.
싸움을 막을 방도를 찾기 위해 만난 것이다.
바로 이 목적에 이들은 충실했다.

그리하여 이야기는 내일 본문에서 아름다운 결과로 끝난다.
그것은 이들이 서로 대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한 확신으로 정죄를 했어도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충분한 마음의 여유가 있었고,
두 지파 반은 그러한 오해에도 마음이 상하거나 방어적으로 비뚤어지지 않았다.

이미 싸우러 갈 작정까지 한 사람들이
상대방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진짜 심각한 범죄라면 전쟁도 불사할 각오와,
그럼에도 서로의 말을 나누는 대화의 마음 자세가 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의 상황을 욕할 자격이 없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정확히 전달하는 데 부족하며,
들을 준비가 대체로 되어 있지 않다.
나는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본문에서 내 문제를 보며,
안타까이 그것의 개선을 위해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