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0-131편,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이라)

성전에 올라가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노래할 때
그 이유, 그 근거는 무엇보다
내 ―우리― 죄의 용서 아니겠는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나의 죄악이다.
주께서 나를 아신다.
내 죄악을 지켜보신다.
그리하여 나는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나아갈 수 없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리하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는다.
‘아,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의 죄가 너무 크고, 저는 너무 처참하여
감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풍성하게 주신 그 영광스러운 은혜를 이렇게 더럽혔으니
너무 죄스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을 뿐이다.

아,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가 이렇게 아뢰기 전에
나를 “사유”하신다!
사유(赦宥)란 ‘죄를 용서하여줌’이다.
그리하여 나는 깊은 곳에서 탄식하며, 회개하며 하나님께 부르짖는데,
바로 이 “사유”를 기억한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나이다.
‘그러나 주께서 용서하시나이다.’
용서로 죄가 사라지며 죄의 결과로부터 해방된다.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러나 이 기쁨은 조금도 방자한 오만으로 연결될 수 없다.
내 죄가 용서된 것을 알면 오히려 두려워진다.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
그분은 나의 죄를 아시는 분이잖는가!
내 죄를 모르는 자 앞에서 나는 마음 놓고 방자할 수 있겠지만
내 죄를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찌 오만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나의 죄악을 용서해주신 그 감사한 분 앞에.
하나님께서 내 죄를 다 용서해주셨다.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는 “풍성한 속량”이다.
그리하여 주님의 사유하심은 곧 “주를 경외”함으로 향한다.

묘하게도 그 다음 시편은
이 “경외”를 “오만하지 아니”함으로 바로 연결된다.
오만함은 비종교적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더 치명적인 것은 하나님을 빙자한 오만이다.
“큰 일”을 하며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는 것,
그것은 아름다운 일 아닌가?
제대로 하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종교적 사역 속에 얼마나 오만과 교만이 숨어 있기 쉬운가!
하나님보다 그러한 사역을 하는 자신을 높이기가 얼마나 쉬운가!
그리하여 시인은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도다”라고 고백한다.
감당하지 못할 일을 하려고 힘쓰는 것,
그것은 사명으로 위임받지 않은 일을 손대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 없이 내가 설정한 목표,
거기서 누가 높아지겠는가?

오만과 교만의 반대인 겸손이란
자신이 오만할 수 있음을 아는 정직함이다.
큰 일과 놀라운 일이 나를 어떻게 오만하게 할 수 있는지를 아는 솔직함이다.
그러면 오만이란, 교만이란
자신에 대한 부정직이요 속임수다.
그리하여 “주여 진실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