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서 1:17-25, 미워하되 긍휼히 여기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이 무엇인가가 가장 중요하며
모든 것의 토대다.
그것은 곧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죄인들을 위한 대속으로
구원이 “단번에” 이루어졌다.
여러 단계를 거치지도 않고,
시간이 오래 걸리지도 않고,
부족하여 뭔가 보충할 것이 뒤에 많이 남아 있지도 않고,
“단번에”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이는 어떤 미혹에도 흔들릴 일이 없다.

그런데도 이미 초대 교회에 “미혹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다.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며 “분열을 일으키는 자”다.
이러한 자들을 부러워하거나 두려워할 것은 전혀 없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든든히 의지하는 자는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한다.
그것은 자신의 경건만을 고수하는 것을 넘어선다.
과연 “미혹하는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행위가 아니라 “거룩한 믿음”,
곧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 위에 자신을 세우는 자,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 하나님께 자기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기도”하는 자는
그 “미혹하는 자”, 그리고 이미 미혹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지 안다.

“미혹하는 자”들을 유다는 이미 예수께서 “정죄”하심을 강조한다.
앞서 요한이서에서는
그러한 자를 “집에 들이지고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강경하게 명령한다.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인 것이다.
이는 분명 이단적 교훈을 주장하고
교회를 분열케 하는 자들에 대한 마땅한 태도다.
그들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그러나 “의심하는 자들”은 “긍휼히 여기라”는 것이
오늘 말씀의 교훈이다.
이들은 “미혹하는 자”가 아니라 ‘미혹 받는 자’일 것이다.
그들은 이미 “육체로 더럽힌” 흔적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미혹하는 자”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이루신 구원을 조롱하듯
“정욕대로 행하”라고 미혹할 때
마음이 흔들려서 그들의 말대로 “정욕대로 행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라”는 것이다.

“긍휼히 여기라”
이것은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인가?
오냐오냐 하고 받아주라는 것인가?
더 나아가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것을 의미하는가?
긍휼히 여기는 것은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그것은 동조나 같은 편이 되어주는 것이 아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은 그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그들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참으로 안타까워하며
그들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특히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고 말씀한다.
“두려움으로”
이것은 의심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다가
도리어 자신이 악한 영향을 받을 수 있음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누구도 자신의 믿음에 자만할 수 없다.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지 나의 믿음이 아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우리가 주께 아뢸 말씀은 이것뿐이잖는가!
두려움은 곧 겸손에서 나온다.
그리고 “두려움으로”
이것은 내가 긍휼히 여길 자가 계속 미혹에 노출되어
의심하고 믿음이 흔들릴 때
최종적으로 “불에” 떨어지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더욱 안타깝고 절실하게
그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도록 그를 긍휼히 여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것과 함께
죄에 대한 단호한 태도가 필요하다.
긍휼히 여기는 것이 동조가 아님이 분명한 것은
바로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라는 말씀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옷”이란 베나, 면이나, 모로 만들어
몸에 걸치는 의복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옷은 죄를 짓지 않는다.
그런데 그냥 옷이 아니라 “육체로 더럽힌 옷”이다.
“육체로 더럽힌” 죄의 흔적이 아니겠는가.
죄 자체, 죄의 흔적, 그것은 미워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공의롭게 미워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된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내가 “육체로 더럽힌 옷”을 미워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죄를 얼마나 미워해야 하는가!
나의 큰 문제는 적어도 내가 짓는 죄를 미워하지 않는 것이다.
덜 미워하는 것이다.
봐주는 것이다.

이 일에 얼마나 성숙한 지혜가 필요한가.
나는 얼마나 지혜롭지 못한가!
미워할 것에 관대하고, 긍휼히 여길 자를 정죄하고.
그러므로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욱 내게 필요하다.
“성령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지 않겠는가.
무엇을 미워해야 할지, 어떻게 미워할지,
누구를 긍휼히 여겨야 할지, 어떻게 긍휼히 대할지,
하나님께서 그 선하신 권능으로 나를 감화하시고 인도하시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