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서 1:1-16,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

초대 교회에 곳곳마다 미혹이 있었다.
며칠 전의 요한이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들을 “미혹하는 자”로서 경고했다.
오늘 말씀은 교회 안에서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다.
그들은 “정욕대로 행하”며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는 자다.
그리하여 유다는 이들을 향해 최악의 결국을 맞이할 자로 꾸짖으며
교회에 경고한다.
이들은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다.
이들은 ‘멸망이 예비된 자들’이다.

오늘 말씀은 이들에 대한 경고로 가득 찼지만,
이들로 인해 두려워하거나 위축될 것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확실히 주신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다.
이것을 유다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라고 다시 알려준다.
“단번에”
이 귀중한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설명하는 중요한 대목에
이 단어가 함께 등장한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로마서 6:10).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브리서 10:10).
히브리서는 “단번에”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언급되는 책이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베드로전서 3:18)

“단번에”라는 말은 여러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단 한 번에’,
긴 시간에 걸쳐서가 아니라 ‘즉각’적으로,
그리고 결국 한 번으로 모자라 그 다음에 또 반복될 필요 없이
‘충분히’ 이루어졌음을 나타낸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이 바로 이러하다.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가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1단계로 십자가를 지시고,
2단계는 물에 빠져 죽고,
3단계는 불에 타서 산화되고,
이런 식으로 자기 몸의 희생을 과시하거나 종교놀음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자신을 “단번에” 제물로 드리셨다.
그것으로 충분했고 완성되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구원도 “단번에” 이루어졌다.
또 다른 과정이 필요하지 않다.
예수를 믿기도 하고,
할례도 받고, 방언도 하고,
고행과 선행을 쌓고 하여 영적 관록을 쌓은 뒤에야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받은 자다.

아마도 미혹하는 자들이 비집고 들어와
성도들을 흔드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바로 이 “단번에”의 의미를 간과하거나 잊기 때문일 것이다.
미혹하는 자들은 예수의 십자가로 불충분하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또는 정반대로
예수께서 “단번에” 이루신 구원이
마치 이제는 죄와 무관한 자로 마음 놓고 죄를 지어도 무방한 듯
방탕을 합리화하고 싶어 한다.
이들은 예수께서 “단번에” 죽으심으로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구원의 뜻을 철저히 왜곡한다.

그러므로 미혹하는 자들을 이기는 것은
바로 이 “단번에”의 교훈을 회복하는 것이다.
죄의 유혹이 있을 때마다
내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나는 “단번에” 구원받았다!―
다시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단번에” 돌아가는 것이다.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여러 단계를 계산할 필요가 없다.
뜸들이고 스스로 미혹 받을 빌미를 만들어가는
어리석음을 “단번에” 거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