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삼서 1:9-15, 진리에게서 증거를 받는 자)

요한삼서의 후반부에는 두 사람이 언급된다.
하나는 본받지 말아야 할 악한 자요,
다른 한 사람은 본받을 선한 자다.

이런 말씀을 볼 때
나는 본을 받거나 받지 않기를 취사선택할 위치에 있기도 하겠지만,
더욱 두려운 것은
내가 바로 그러한, 본이 될, 또는 본이 되지 않을 대상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나는 디오드레베와 데메드리오 중에
누가 선하고 악한지, 누구를 본받고 본받지 말아야 할지를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 두 사람 가운데
과연 나는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를 판단 받아야 한다.
나는 얼마나 판단하기를 좋아하는가!
나는 판단받기를 얼마나 싫어하는가!
그러나 판단 받아야 한다.

사도 요한이 본받을 자로 데메드리오를,
그 반대로 디오드레베를 예로 들었다.
데메드리오에 대해서 한 말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가 “뭇 사람”에게서 본받을 자로 인정을 받는데,
그 증거를 “진리에게서도” 받는다는 말씀이다.
그 증거와 인정은
데메드리오가 “선을 행하는 자”요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증거와 인정을 자신이 하고 있다면
그것은 신빙성이 없다.
누구나 자신을 잘났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자신에 대해서는 최대한 관대하며 누구보다 자신을 우선으로 한다.
나는 나를 자책하고 자학하기도 하지만
나를 가장 위한다.
그래서 좋은 말 듣기를 원하고 인정받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에게 객관적이지 않기가 아주 쉽다.
증거와 인정은 나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서 나올 때 믿을만하다.

그런데 아무리 타자의 증거와 인정이
나 자신의 판단보다 객관적이어도
사람의 생각은 주관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내 측근의 한두 사람이 아니라
“뭇 사람”에게서 받는 인정, 칭찬이 있다면
그는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다.
그래도 모든 사람들은
대체로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 판단을 하며,
아니면 그의 행동과 태도와 표정에 감추어진 보이지 않은
그의 의도를 추론할 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드러나는 객관적인 ‘거울’이 있다면
그 앞에서의 증거는 완벽할 것이다.
그 거울이 곧 “진리”다.
“진리”가 편파적이거나 주관적이거나 부분적일 수 있겠는가.
“진리”가 증거를 대는 증언은 진실이다!
“진리”가 데메드리오에 대해
“선을 행하는 자”로서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진리를 증언해야 한다고 하는데,
진리가 데메드리오를 증언한다!

그러나 진리는 어떤 문서, 어떤 사실,
모든 것을 재생할 수 있는 완벽한 녹음·녹화 시설 이상이다.
진리는 조문이나 도구나 시설이 아니라,
살아서 판단하는 인격이다.
진리는 모든 것을 ―드러난 것과 감추어진 모든 것을― 판단하는 분이다.
바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가 그분이다.
데메드리오는 바로 이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다.
즉 예수께서 그를 증언하신다.
우리가 예수를 증언하는 사명을 받았지만,
예수께서 우리를 증언하신다.
아, 나는 진리를 세상에 증언할 때 떨리고,
기가 죽어 말을 다 못하고,
결국 내게서 예수가 누구인지 다 진술되기 못한다.
나는 얼마나 비겁하고 어리석은가.
그러나 예수님의 증언이 그러겠는가.
진리이신 예수께서 증언하시는 자,
예수님에게서도 증거를 받은 자,
데메드리오가 그렇다.
아, 그 인정과 보증을 내가 얼마나 사모해야 하는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