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서 1:7-13, 미혹)

사도 요한이 처음부터 왜 그렇게 “진리”를 강조했는지
그 이유가 분명하다.
당연히 믿음이 “진리를 아는” 데서 시작하며,
그것은 곧 “진리를 행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진리”가 특별히 강조된 것은 바로 “미혹” 때문이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다!
초대 교회 때나 지금이나 언제나 그러하다.
마귀가 마지막 멸절되기까지 잠시라도 쉬는 시간이 있겠는가.

모든 시대에 미혹의 핵심은 진리를 흩으러 놓는 것이다.
마귀에 휘둘릴 만큼 진리가 약하거나 불분명해서가 아니다.
사람들이 진리에 이르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눈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진리”는 무엇인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스스로 계시하셨다.
그런데 “미혹하는 자”가
진리이신 예수를 아는 길을 교묘하게 흩으러 놓는다.
예수를 말하기는 하는데,
그 진리의 핵심을 우회하고 왜곡하고 변질시킨다.
‘내가 구세주다’라고 떠드는 자는 너무 노골적이어서 그 어리석음이 쉽게 드러나고
이내 이단의 쓰레기 더미에 속에서 사라진다.

초대 교회에서 미혹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들린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주 교묘한 미혹이다.
그것은 단지 예수가 영혼으로 왔는가 육체로 왔는가,
형질을 따지는 정도가 아니다.
성경이 전해준 복음, 우리가 믿는 진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사역하시고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것이란,
예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신 것,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고통당하신 것,
죽은 몸이 부활하신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종교들이 다 잘하는 이것저것의 ‘혼합’으로 귀결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것의 귀결은,
예수를 모든 영의 혼합으로 제조한다.
‘몸’만 빼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부처의 가르침에 예수가 있고,
예수를 힌두교 속에서도 찾고,
코란에서 예수를 발견하고,
공산주의자 예수를 만들어낸다.
이 모든 예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베들레헴에 아기로 태어나서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자라고
갈릴리와 유대에서 제자들과 동거하며 가르치고 고치고,
그리고 골고다 십자가에 매달리고
아리마대 요셉의 새 무덤에 매장되고
거기서 부활하셔서 무덤 문을 열고 나오신 것을
일체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 ‘영들의 혼합’에 전혀 중요하지 않다.
예수는 하늘에 있는 신이요,
닦고 닦은 영겁의 도(道)요,
시대정신이요,
자연이요 우주요,
혹은 사회정의요,
사랑이요, 라고는 말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은 부인한다.
왜냐하면 육체로 오신 예수는 오직 한 분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만 비껴가면, 우회하면, 돌려 말하면,
예수는 오직 한 분이 아니라 여럿이 되며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
그 “미혹” 안에서는 모두 예수를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도 예수를 말하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하건대,
왜냐하면 육체로 오신 예수는 오직 한 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학문은 과학을 빙자하여 더욱 대범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한다.
예수에게서 육체를 빼고
오직 종교현상으로서 정신과 교훈과 영향과 세력을 논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은
아예 과학으로 원천봉쇄 된다.

진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교훈,
행하신 사랑,
사람들을 놀라게 한 기적이 아니라,
그 교훈을 말씀하시고,
그 사랑을 베푸시고,
그 기적을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께서 가르치고 행한 교훈과 사랑과 기적은
얼마든지 베끼고 복사되어
어디에도 그런 게 있고 누구도 그런 것을 행했다고 신화로 부풀려진다.
그런 진리의 복제는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나,
진리이신 예수는 복제가 되지 않는다.
진리이신 예수는 나사렛 예수이기 때문이다.
진리이신 예수는 골고다의 예수이기 때문이다.
진리이신 예수는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을 나온 예수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이다.
오직 육체로 오신 예수만이 진리다.
오직 육체로 오신 예수를 믿는 것이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