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1-11,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

바울에게 빌립보 교회는 특별한 곳이다.
2차 전도여행 중에 바울의 사역으로 교회가 생겼고,
그 이후에도 바울의 사역을 계속 도왔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간수들 가운데 믿는 이가 나오고
그 가족이 다 믿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타지의 감옥에서 이 교회로 편지를 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연 때문에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쁜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참여” 때문이다.
빌립보 교회는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라고 말한다.
참여란 같이 하는 것이다.
동참이요 동역이다.

누구에게, 무엇에 참여하는 것인가?
즉 누구와, 무슨 일에 함께 하는 것인가?
바울도 그렇고 빌립보 교인들도 그렇고 그들 모두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들이다.
그들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 함께 하고
하나님의 일(“복음을 위한 일”)에 함께 하는 자들이다.
이 세상은 결국 이 점에서 둘로 나뉜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자.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아, 그리고 이 사실이 인간의 운명을 나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에 함께 하면서도
복음을 위한 일에 아직 참여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복음을 위한 일”이란 좁은 의미로는
전도하는 것, 해외 선교하는 것,
일상과 생업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을 위해 변혁하는 것,
환경에 대해 하나님의 청지기 직분을 감당하는 것,
이런 것이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예수님)을 믿은 것 자체가 “복음을 위한 일”이다.
복음을 받아들인 일 자체가 복음을 위한 일이다.
당연히 그 이후의 성장과 성숙이 있고,
그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사실은 모든 성도가 그 긴 과정 속에 있다.

이와 더불어 중요한 것은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과 함께 한 사실이다.
꼭 바울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도들과의 동역, 성도들의 교제에 동참, 성도들을 위하는 것,
이것이 성도와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과 성도와 함께 하는 것이
분리가 되거나 단계적인 것은 아니다.
누구라도 먼저 믿은 성도를 통해 복음을 들으며,
그때 이미 그는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성도와 함께 한다.
혹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은 중시하면서
성도와 함께 하는 것은 덜 중요하거나 선택사항 정도로 여긴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과도 함께 하지 않는 것이다.
성도와 함께 하지 않으면서
―성도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성도와 사귀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차원의 참여, 함께 함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착한 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시고 이루실 것이지만,
성도는 주님의 그 주권에 순종해야 한다.
순종이 곧 성도의 할 일이요, 노력이요, 의무다.
물론 그것은 결코 조건이나 공로가 아니다.
은혜 받은 자에게 마땅히 나타날 결과다.
그 마땅함을 행하는 자가 성도다.

나는 누구와 함께 하고 무슨 일에 함께 하는가?
하나님과 성도가 나의 늘 기쁜 참여의 대상이 되고 있는가?
주님은 나와 함께 해주셨다.
나는 조금만 나태하면 주님을 잊고, 거의 나에게만 집중한다.
주님이 ‘냄새’나는 나에게 오셨는데
나는 성도들, 사람들을 너무도 판단하고 차별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사랑한다.
내게 “심장”의 문제가 있다.
나는 ‘나의 심장으로’ 사람을 대하니 바울과 같은 사랑이 나오지 않는다.
내가 머리로는 예수를 믿는데 심장은 여전히 내 심장이다.
아, 언제나 되어야 내 몸이, 내 영혼의 전체가 온전히 바뀌겠는가!
바울이 빌립보의 성도들의 성숙
―“사랑”과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되기를―을 위해 기도한다.
나는 나 자신의 성숙을 위해 얼마나 기도하고 있는가?

기도로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