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9:113-128, 부끄럽지 않은 소망 대 허무한 속임수)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한다는 고백으로 오늘 본문이 시작된다.
“두 마음”이란 일관성이 없는 기회주의적인 상태라 할 수 있다.
가령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기는 것 같은 것이다.
말로는 이웃사랑을 주장하며, 실제로는 이기심대로 생활한다.
“두 마음”은 악한 ‘한 마음’과 사실은 같다.
아니 더 나쁘다고 할 수 있다.
겉으로 선한 체 하여 도덕적 정당화를 꾀한다는 점에서 더 나쁘다.

본문에서 서로 반대되는 “두 마음”을 찾는다면
‘부끄럽지 않은 소망’과 ‘허무한 속임수’일 것 같다.
“소망”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가 멸망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갈 것이 선언되었지만
백성들은 그러한 일이 전혀 닥치지 않도록
바벨론이 패망하여 물러날 것이라는 ‘소망’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소망’은 하나님의 엄연하신 말씀에 비추어볼 때
‘허무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하나님 말씀에서 나오지 않는 ‘소망’은 헛되며, 결국 악하다.

‘부끄럽지 않은 소망’이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소망이다.
‘허무한 속임수’는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인간의 의지,
더 나아가서는 마귀의 궤계에 의한 것이다.
이 둘은 공존할 수 없는 대립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둘을 동시에 품고 있다면
그것은 곧 “두 마음 품는 자”의 행위다.
이 “두 마음”은 결국 하나로 통일되어야 한다.
당연히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것만이 그 하나다.

내가 바라는 것은 과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가?
하나님 말씀에 기초한 것인가?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에 강력하게 영향을 끼치는 성공주의, 형통주의 신앙 행태는
교인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힘과 위로를 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에 근거를 두지 않은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그러한 조류의 목적은 결국 자기가 잘 되는 것이다.
그것이 문제인 것은 그 목적의 성취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어도
그것을 추구하겠다는 데 있다.
결국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끄럽지 않”은 소망이 중요하다.
“소망”이 만일 부끄러운 소망이 된다면 그것은 ‘허무한 속임수’다.

새해는 계획을 짜는 계절이다.
교회마다 12월 내내 새해의 계획을 위해 수많은 회의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소망과 계획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인지,
내가 바라는 것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그 구분의 기준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 말씀이다.
말씀에 근거한 것이 ‘부끄럽지 않은 소망’이다.
그렇지 않으면 ‘허무한 속임수’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