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9:97-112, 내 마음의 즐거움)

전체적으로 시편 119편은 고난의 상황에서 쓴 시라고 할 수 있다.
고난이나 핍박이나 위기에 대한 설명이 계속되고 있다.
단락에 따라 직접적으로 이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 시에서 특별히 생명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죽음에 직면한 위협적 상황 때문이요,
기쁨과 즐거움을 표현하는 것도 슬픔과 고통을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주의 말씀이 생명과 기쁨을 준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단락은 특히 고난에 대해 많이 언급한다.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나”
“악인들이 나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사오나”
아마도 이런 상황이라면 신음과 탄식과
심지어는 불평이 나오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나
이 시인은 오히려 정반대의 것을 말한다.
바로 “즐거움”이다.

그는 아주 심한 고통과 고난의 상황에 처해있지만
이 괴로움들이 한시적이며 그에게는 영원한 것이 있음을 확신한다.
“주의 증거들로 내가 영원히 나의 기업을 삼았사오니”
“주의 증거”는 곧 주의 말씀이요 그것은 “영원한 기업”이다.
주의 말씀이 영원한 재산이요, 상속이요, 생업이다.
이 세상이 추구하고 가치를 두는 재산과 상속과 생업은 모두 한시적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게 조금 더 많으면
그것을 다른 사람을 누르는 도구가 되고 성공한 자라고 으스대고
엄청난 자부심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그것은 한시적이므로 결국 그 자랑과 자존감은 끝까지 가지 못한다.
오직 영원한 것에서만 영원한 기업이 나온다.
주의 말씀만 영원하며 거기서 영원한 기업을 얻는다.

사람들은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부와 권세에서도 즐거움을 얻는데,
영원한 기업은 얼마나 놀라운 즐거움을 줄 것인가!
그리하여 시인은 “주의 증거들로 내가 영원히 나의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라고 고백한다.
즐거움이 어떻게 주의 말씀에서 나오는지,
또는 주의 말씀이 어떻게 즐거움이 되는지는
예레미야의 묵상에서 분명하게 밝혀졌다.
하나님은 유다가 망하기 전에 이미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할 사실을 예언하신다.
그때가 되면 “감사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가 회복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30:19)
이것은 예레미야의 개인적인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신 약속이요 예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성취되므로
하나님께서 즐거움에 대해 약속하셨으면 당연히 즐거움이 임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곧 즐거움이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 교회의 2019년 표어는
“감사와 즐거움이 넘치는 교회”다.
장기적인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 감사와 즐거움이 가득한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지난번의 예레미야 묵상을 통해 얻은 통찰이었다.
물론 하나님께서 즐거움의 회복을 말씀하셨으므로 이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며,
그러므로 즐거움을 바라고 믿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즐거움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즐겁기 이전에
이미 하나님 말씀 자체가 즐거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이 곧 진리이기 때문이다.
즐거움이란 거짓과 허위와 비진리에서 나올 수 없다.
거기서 즐거움이 나온다면 속임수다.
하나님이 심판을 말씀하셔도 그것은 세상에 궁극적으로 즐거움이다.
왜냐하면 유다 백성이 죄를 짓고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기꺼이 순종할 때
하나님은 구원과 회복을 약속하시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한 즐거움이다.
즐거움은 말씀을 영원한 기업으로 삼는 자,
세상의 일시적인 가치들에 믿음을 상대화하지 않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렇다.
“주의 말씀이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말씀을 결코 상대화할 수 없는 내 삶의 기반으로 인정하는 것을 전제한다.
이것이 지금 내가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