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9:81-96, 나를 살리는 것)

하나님 말씀을 노래하는 시편 119편은
벌써 여러 차례 말씀을 생명과 연결시켜 설명했다.
하나님 말씀이 나를 살리셨다.
이때 생명이란 그냥 산천이 푸릇해지는 봄에 노래하는 자연예찬으로서의 낭만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현실에서 고백하는 생명이며,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벌어지는 사건이요 사실이다.
성경에서 생명과 죽음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이요 현실적인 기반이다.

이미 50절에서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라고 고백할 때
생명은 “고난”이라는 상황을 전제한다.
시인이 고난 가운데 있기 때문에 생명이 의미 있다.
그때 그를 살린 것이 무엇인가?
바로 “주의 말씀”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시인은 이러한 상황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는 “핍박” 가운데 있다.
그를 “멸하려고 엿보”는 악인들에 둘러싸여 있다.
시인은 “고난 중에 멸망”을 당할 위기에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는 다시 고백한다.
“주께서 이것들 때문에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
“나를 살게” 하는 “이것들”이란 무엇인가?
바로 앞에 나오는 “주의 법도들”이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 때문에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
나를 살게 하는 것은 주의 말씀이다.

나를 살리는 것은 주의 말씀이다.
고난은 나를 죽이지 못한다.
고난이 위로가 되는 것은 고난 자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의 능력 때문이 아니다.
고난은 죽음의 능력이 있지 그 자체로서 생명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보통 사람이라면 고난으로 인해 아프고 고통스럽고
결국 죽음의 문턱에 있을지라도
성도는 주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살아난다.
고난 중에도 나를 살리는 하나님 말씀이 있다.
하나님이 생명을 창조하셨고, 그때 그것을 말씀으로 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 말씀이 곧 생명이다.
고난 중에도, 핍박 앞에서도,
악인이 멸망시키겠다는 위협에도
나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다.

나를 살리는 것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사실은,
그 반대로 내가 살고 죽는 것은 고난이나 장수의 묘약,
또는 교통사고와 질병이나 안전과 노후복지에 달려있지 않다는 사실도 의미한다.
그러하다.
나는 고난으로 죽지 않는다.
고난은 나를 죽이지 못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것은 단지 내 몸에 손을 댈 뿐이다.
고난이 내 육신의 생명에 손을 대지 못해도 어차피 그것은 죽는다.
내 몸에는 생명의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
고난은 죽음의 시간을 앞당길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나를 “영원히” 살린다.
내가 “이것들 때문에” “살게” 되는 것은
일시적으로 죽음을 면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영원히 살린다.
그러므로 나를 살리시는 것이다.
의사나 병원이나 돈이 나를 살리는 것은
몇 시간, 며칠, 몇 년 더 생명을 연장하다가 결국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나를 영원히 살리신다.
몸이 아니라 영을 살리고,
―아, 마지막 날에는 몸도 영원히 살게 하실 것이다!―
한시적인 생명 연장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