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17,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신약성경의 첫 대목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로 시작한다.
본문에 언급되는 아브라함부터 요셉에 이르기까지 41명이 예수의 인간 조상이었다.
이들은 모두 남자이므로 실제로는 41명의 여성이 더 있어야 하고,
모든 출생은 여성의 배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계보”의 기록은 당시로서는 특이하게도
그 가운데 네 명의 여인을 명시한다.
그 중 셋은 창녀요 기생이요 간음(당)한 여인이다.
사실은 남성들의 경우 상당수가 이에 준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유다)의 왕들 가운데는 악인이 훨씬 많았다.
그들은 도덕적인 문제 이상으로 우상숭배와 같은 패역한 길로 간 자들이다.
그들 모두가 예수의 조상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 같이 성결한 자들로만 구성되지 않았다.

여기서 몇 가지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모든 조상들 각각의 결함은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셔서 그들에게는 책임이 없는 운명이 아니다.
모든 죄는 사람에게 책임이 돌아간다.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악인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를 좌지우지하지는 못한다.
하나님은 악인을 벌하시거나, 긍휼히 여기시는 데서
전적으로 주권적으로 공의로우시며 사랑을 베푸신다.
예레미야의 묵상에서 이것이 강조되고 강조되었다.
죄 지은 유다 백성은 공의롭게 심판을 받지만,
그 벌을 받고나서야 구원이라는 긍휼을 얻는다.
이 흐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그들 가운데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패역한 왕들이 즐비하며,
그리하여 심판을 받아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며,
또한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왔다.
남유다가 망할 때 사람들이 헛되이 소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은 죄인들을 그냥 봐주는 분이 아니며,
그렇다고 인간의 죄악 때문에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는 무력한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심판하시면서도,
아니 심판하심으로 자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바로 그러하다.

둘째, 그러하므로 인간의 역사와 내 삶을 절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믿고 소망해야 할 것이며,
또한 그 소망이 조금도 우쭐대는 빌미가 될 수 없고
오로지 겸손하고 낮아져야만 하는 근거가 되어야 한다.
즉 겸손한 소망,
이것이 성도가 역사와 자신에 대해 가져야 하는 근본적 자세다.
교만한 소망(확신)도 아니요
절망에 빠진 겸손도 아니다.

셋째,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약속들을 신뢰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은 인간의 어떤 역사와 상황에서도 반드시 이루어진다.
언약은 성취된다.
말세에 ―아, 특히 지금 우리나라에서― 아무리 패역함이 커져도
하나님께서 이루실 구원의 역사를 신뢰하자.
두려움보다 소망이 더 커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권능이 명백하므로
나는 더욱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은 결국 우상숭배가 된다.
나의 믿음이 아직 연약하므로 나는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여
내가 참으로 순종하는 자가 되도록 도와주시기를 간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