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4:1-12,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으라)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각 개인으로 부르신다.
누구나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고 단독자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믿음은 가족이나, 무리나, 인종과는 아무 상관 없는 나 한 사람의 결단 행위다.
믿음은 철저히 하나님과 나만의 관계다.

그러나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나는 곧 내가 공동체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안다.
나는 하나님께 나 혼자 나아갔더니 거기에 많은 사람이 있었다.
하나님은 자녀가 많으신 아버지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이들은 모두 나와 같은 하나님의 자녀다.
우리는 공동체다.
하나님은 이 공동체를 계속 확장하시고 우리의 관계를 계속 공동체적으로 새롭게 하신다.

이것은 마지막 때에 흠 없이 아름다움 자체로 완성될 것이지만,
지금 이 땅에서도 맺어가야 하는 열매다.
부족하지만 서로 공동체로 만들어지는, 만들어가야 하는 긴 과정이 있다.
이 단계는 ─즉 여기서는─ 일사불란한 획일화 과정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고 차이가 나고 또한 모자라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그러한 상태로 받으셨다는 사실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을 때 다시(거듭) 태어나는 것이며,
그때 모두 어린아이다.
그리고 영적으로 성장한다.
모든 믿는 자는 성장 중에 있는 어린이다.
서로 다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모두 그 상태로 받으셨다.
그러므로 나와 얼마나 닮았고, 통하고, 맞는지에 무관하게
그도 하나님의 자녀요 나도 하나님의 자녀다.
여기서는 내가 기준이 아니다.
그도 기준이 아니다.
하나님의 받으심만 유일한 기준이다.
예수를 믿는 이는 모두 하나님께서 받으신 이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다.

그러므로 어떠한 판단과 비교는 공동체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내 기준으로 획일화하려는 것이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가 아니라 내 공동체를 만들려는 헛수고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결국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드러내며 나의 영광을 위한 자가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내 기준에 부합하지 않아 내게서 비판받고 업신여겨지고 배제되는 자를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사실이 진실이다!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그런데 사실 여기서 서로의 다름과 차이란 무엇에 관한 것인가를 잘 봐야 한다.
본문에 적시한 대로 먹는 것과 날에 대한 의견에서 벌어지는 문제다.
이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 주 예수는 내가 어떤 것을 먹는 일을 고치기 위해,
어떤 날을 중시하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용인하시는 견해 차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다양성이다.
심지어는 믿음의 초보와 장성한 분량의 차이에서 나오는 이견이라도
하나님께는 다 받으시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

내가 하나님께서 형제들을 받으신 그 넓이를 얼마나 더 잘 이해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이해가 참으로 부족하다.
내가 판단하는 것은 사실 거의 이 수준에서다.
내게 익숙하고 편하고, 그 반대로 낯설고 불편하고는 거의 이러한 사안에서다.
그러니 문제다.
문제 삼지 않을 것을 문제 삼으니 문제다.
하나님은 그 다양함을 보고 기뻐하시며 그 차이를 통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시려 하는데
나는 나의 기준으로 그 다양성을 해치려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부르신 공동체의 소중함을 무시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공동체에는 아무 원칙도 기준이 없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딱 한 가지의 기준과 원칙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기준이요 하나님의 원칙이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으로 부르시는 기준이 있다.
예수를 믿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하신다.
이것은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다양성이나 타협이 허용되지 않는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것을 위해 목숨을 바쳤고 순교했고
이것을 지켜서 오늘날도 복음이 전수되고 전파되게 하였다.
그들은 음식과 절기 때문에 목숨을 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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