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13-24,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사람이 죄인임에도 구원을 받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돌감람나무”가 “참나무”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는 것이다.
돌감람나무는 돌감람나무의 열매를 맺을 뿐이나,
참감람나무에 접붙여져 참감람나무의 열매를 맺는다.
이렇게 구원을 받는 것은 돌감람나무 스스로 한 일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그를 참감람나무에 접붙인 농부의 의지에 의한 것이다.

그 농부가 바로 선하신 하나님이시다.
돌감람나무를 폐기하고 참감람나무만 기르는 것이 생산성을 추구하는 농부의 상식적인 전략일 것이나,
하나님은 경제 원리가 아니라 생명의 원리를 행하신다.
죄인을 구원하시고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 열매를 맺도록 변화되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고 사도 바울을 명령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란 선한 농부가 돌감람나무를 참감람나무에 접붙이는 사랑을 말한다.
그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는 자가 죄인에서 구원받은 의인으로 변화된다.
이 사랑이 언제 나타났는가?
바로 예수가 십자가에 달렸을 때고 그것을 믿는 자는 그 인자하심에 머무는 자다.
사람이 스스로 인자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인자하심을 의지하고 그 안에 거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의 준엄하심이란 “넘어지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말한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은혜로써 구원하신다.
그것은 그들이 의로워져야 하는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는 뜻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의 은혜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지 않으면 그 은혜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넘어진 자가 일으켜 세워주는 자를 뿌리치고
‘내가 어떤 상태에 있든 당신은 나를 구원해줘야 하지 않느냐’,
‘어차피 죄인을 은혜로 구원하는 것이면 내가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것 아니냐’라고
떼를 쓰는 것과 같다.
그것은 진창에 빠져 허덕이는 자를 구출해주었더니
그가 계속해서 진창으로 달려가 더러워지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께서 구원의 조건을 채워주시고 누구든지 남기시는(남은 자가 되게 하시는) 은혜를 말한다.
하나님의 준엄하심은 그 은혜를 거부하고
죄인의 삶을 그대로 살겠다고 하는 나머지 사람들에 대한 공의로운 심판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돌감람나무를 참감람나무에 접붙이시는 은혜에 머물러 참감람나무의 열매를 맺는 삶이요,
하나님의 준엄하심은
그 접붙임을 거부하여 돌감람나무로서 여전히 돌감람나무 열매를 맺는 삶이다.
이 접붙임을 감사하며 수용하는 자는 겸손한 자요,
거부하며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하는 자는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자다.

참으로 선한 농부이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이것을 안 보는 것은 얼마나 교만한 것인가!
하나님이 보라고 하는 것을 보고, 보라고 하실 때 보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인자하심만을 보는 것, 반면에 하나님의 준엄하심만 보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공의를 모르고 방자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공포에 빠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이 두 가지를 다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