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1-12, 남은 자와 나머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심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역사는
신약시대에 이르러 끝난 것인가?
이제는 하나님이 그 약속과 선택과 무관하게 구원을 이뤄가시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이 아닌 사람들은 환영할 일이지만
결국 하나님의 약속이 무효해진 것인가 하는 의문을 낳는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는 예수께서 오시자 영적으로 갑자기 축소된 것이 아니다.
예수가 이스라엘의 영적 특권을 흔들어놓은 것이 아니다.
구약시대 내내 이스라엘은 스스로 하나님의 약속을 저버리는 길로 갔다.
하나님이 약속을 파기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그 약속을 어긴 것이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약속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이 정당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들 가운데 남기신 자들이 있다.
이들은 “남은 자”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남기신 자’다.
하나님께서 남기신 자만 남은 자가 될 수 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이 ‘남은 자’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스라엘이 파기한 것을 하나님이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셨다.

“남은 자”가 있다는 것은 ‘남지 않은 자’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들은 ‘남은 자’의 ‘나머지’다.
둘 다 ‘남다’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이지만 그 의미와 내용은 정반대다.
그 둘은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10에서 1이 남았으면, 그 나머지 9는 남지 않은 것이다.
1이 ‘남은 자’이고 9가 ‘나머지’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은 인류 가운데 ‘남은 자’였고, 이방인은 그 ‘나머지’였다.
이스라엘은 ‘남은 자’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온 세상에 드러내고 전하는 자였다.
그러나 그 일을 신실하게 감당하지 못함으로
그들 스스로 그 약속에서 배제되는 자가 되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반전이 일어났다.
‘나머지’였던 이방인이 ‘남은 자’가 되고
‘남은 자’였던 이스라엘이 ‘나머지’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방인을 구원에서 배제해놓으셨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제 ‘남은 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또한 끝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부르셨던 그 사건을 무효로 폐기하지 않으신다.
이방인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보고
정신을 차리고 이제라도 하나님 백성의 자리로 돌아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있다.
이스라엘이 넘어짐으로 이방인이 구원을 얻자,
그것이 이스라엘을 “시기나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가운데
이방인의 구원을 통해 예수를 믿는 자리로 돌아온 “남은 자”들이 생겼다.
이로써 이스라엘에 다시금 ‘남은 자’가 남는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역사가 이러하다.
‘남은 자’에서 배제된 ‘나머지’ 중에 ‘남은 자’를 삼으시고,
‘남은 자’였다가 ‘나머지’로 전락한 자 가운데 다시금 ‘남은 자’로 남는 자가 생긴다.
아, 하나님은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인가!
나는 이러한 역사에서 어느 단계까지 인내심이 있겠는가?
나의 인내는 초반에 이미 끝난다.
나는 누구도 결코 남기지 않을 것이다.
그 전에 이미 화가 나고 배신감으로 토라져 다시는 상종하지 않을 것이다.
아, 만일 하나님이 이와 같이 속이 좁았다면
이 세상에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누가 남을 수 있는가?
다시 말하지만 구약과 신약의 시대에 구원의 자리에 남은 자는
사실 하나님께서 남기심으로써만 가능하였다.
하나님이 나를 남기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도 남기시고 이방인도 남기신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에도 남은 자가 있고 이방인에도 남은 자가 있다.
이 긍휼의 역사에서 끝까지 ‘나머지’로 배제되려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나는 사람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인간을 ‘나머지’로 보지 않고 얼마나 ‘남은 자’로 보아야 하는가!
그래야 복음을 전할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