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7:1-13, 죄가 기회를 타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와 연합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나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다.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나는 하나님께 대하여, 즉 의에 대하여 산 자가 된다.
예수를 믿는 것은 단지 신조나 교리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연합되어 죄에 대해 죽었으므로 죄와 무관한 삶을 살고,
의에 대하여 살았으므로 거룩한 행실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것이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때 내가 죄인인 것을 절망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
바로 율법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렇다.
율법이 없다면 나는 죄가 무엇인지, 내가 죄인인지 아닌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창조세계의 질서─‘인간 사용 설명서’─가 곧 율법이다.
인간은 아담의 타락 이후 자기를 주인으로 알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율법을 통해서다.
이것이 율법의 유익이고 또한 목적이다.

죄는 율법 이전에 이미 있었다.
아담의 타락은 모세의 율법 훨씬 전에 벌어진 일이다.
그리하여 율법 이전에는 죄를 짓고도 죄를 몰랐지만 율법에 의해 그것이 죄인 줄을 안다.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5:13)
죄는 율법 이전에 이미 기능하고 있었다.
죄는 얼마나 교활한지 어느 때나 기회를 탄다.
율법이 없을 때는 죄가 아닌 듯이 ─죄를 모르므로─ 마음껏 죄를 짓게 하고,
율법이 있을 때는 오히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다.
율법이 하지 말라고 한 것을 나는 부득불 하고 싶어서 더 죄를 짓도록 죄가 유혹한다.
나를 죄짓도록 유혹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죄 자체다.
죄는 언제나 내가 죄를 짓도록 기회를 엿본다.
모든 기회를 죄짓도록 이용한다.

아, 나는 안다.
내가 얼마나 죄를 짓고 싶어 안달인지,
모든 기회를 죄짓는 데 이용하는지를!
그렇게 함으로써 죄는 의기양양하게 제 뜻을 이룬다.
나는 그리하여 죄의 종이다!
죄가 시키는 것을 순종하는 죄의 종이다.

그러나 내가 죄를 죄로 알게 될 때 죄는 큰 타격을 입는다.
나는 죄를 혐오하며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방어할 것이기 때문이다.
율법은 내게 죄를 알게 함으로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죄를 짓지 못하게 율법이 나를 위해 해줄 일은 없다.
아, 나는 율법으로 인하여 가련한 자가 되었다.
그러나 죄짓고 내가 가련한 자임을 알게 된 것은 매우 희망적이다.
오히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자가 절망적이다!

그러나 율법이 하지 못하는 일이,
나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서 율법에 대해서 죽으심으로 내게 일어난다.
나는 율법을 통해 죄를 절망적으로 알게 되었고,
예수와 함께 죽고 살므로 하나님께 대하여 살게 된다.
나는 죄를 용서 받고 이제는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삶으로 초대된다.

그럼에도 십자가의 피로 죄에 대해 죽은 자에게도 죄는 기회를 타서 죄를 짓게 한다.
예수를 믿고도 다시 죄를 짓는다!
이것은 모순적인가?
이 세상에서는 거룩함에 이르는 과정이므로 단번에 죄짓지 않는 존재로 비약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는 회개함으로 죄를 용서받고 정죄함이 없으며,
그러므로 그것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요한일서 5:16)에 속한다.

나는 예수를 믿고도 죄를 짓는 나의 연약함을 언제나 탄식하며 경성하고
참으로 무릎 꿇고 하나님께 더욱 나아가야 한다.
나는 자고할 수 없다.
그러나 또한 내가 너무나 연약하여 언제나 기회를 타고 내가 늘 넘어지는 죄라 할지라도
예수 안에서 죄가 왕노릇할 수 없는 것을 알고
나는 다시 담대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죄를 물리친다.
내게 죄의 물리침은 죄를 짓지 않음이요,
그리고 지은 죄를 회개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