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10:18-36, 예후의 영적 개혁과 허점)

하나님께서 예후를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것은
아합의 온 집을 심판하시고자 함이요
그 가문으로 인해 더럽혀진 나라와 백성들을 새롭게 하기 위함이다.
예후가 과연 이 사명을 잘 감당했는지의 여부가 그에 대한 판단의 중심이 된다.

그는 아합의 사람들을 징벌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잘 감당했다.
그가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모아 몰살함으로 바알 종교를 퇴치하는 장면은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한 행동을 연상시킨다.
그 방법이 위장 전략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나지만
바알의 선지자와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은 똑같다.
예후는 실로 북이스라엘의 왕들 가운데 영적 개혁을 감행한 유일한 인물이다.

개혁은 매우 중요한 일이나 그것이 얼마큼 철저히 시행되었는가가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개혁을 시도했지만 철저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개혁될 대상과 내용이 남아 있다는 뜻이요
그 개혁이 완성되지 못함으로 불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후의 개혁이 그러했다.

그는 아합에 속한 사람들과 우상숭배를 근절하였지만
그 이전부터 있었던 근본적인 문제는 손대지 못했다.
북이스라엘의 첫 왕인 여로보암때부터 시작된 우상숭배의 문제다.
그는 남유다의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으로 백성들이 돌아갈까 두려워
벧엘과 단에 대체 제단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게 무엇이냐면 바로 “금송아지”였다.
여로보암은 예루살렘 성전을 모방하여 대체 성전을 건축한 것이 아니라
아예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을 대체하여 섬기게 한 것이다.
광야에서 아론이 행한 일과 흡사하다.

그것이야말로 영적 개혁의 대상이었다.
바알 종교는 아합에 의해 들어왔으므로 아합의 온 집을 제거하면 될 것이지만
금송아지 숭배는 북이스라엘이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어선,
점점 더 세뇌되어 그냥 따라간 북이스라엘의 원죄적 출발점이었다.
그것을 제거해야 했다.

그러나 예후는 거기까지 가지 못했다.
아마도 그의 개혁은 다분히 정치적인 범주에 머무른 인상을 준다.
자신이 몰아내는 아합 가문의 척결은
곧 정치적 반역을 문제 삼을 모든 대적들의 제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참으로 하나님을 위하고 영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다면
북이스라엘의 근본적 문제가 무엇인지 알았을 것이다.
그는 벧엘과 단의 금송아지를 파괴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동참하게 했어야 한다.
그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가 하나님에 의해 왕으로 부르심을 받았고
북과 남의 왕조에 남아 있는 아합 잔재를 청산했으니
그는 이때 영적으로도 북과 남이 하나 되는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정치적인 지배 범위를 우선 분명히 하는 데 주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영적 개혁의 한계를 정했고
결국 그는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한 자가 되었다.

나의 신앙은 얼마나 덜 철저하며 대충하는 것이며 부분적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