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20:1-11,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히스기야 왕이 엄청난 위기를 극복했다.
그의 재위 6년에 앗수르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패망했고,
똑같은 종말이 남유다에도 곧 일어날 뻔했다.
재위 14년째에, 즉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지 8년 뒤에
앗수르가 남유다를 침공하여 정복당할 위기에 이르렀다.
앗수르는 남방의 강대국 애굽까지 다 차지할 기세를 과시하며
조그만 나라 유다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양
마음껏 조롱하고 비웃으며 심리적 전술만으로 예루살렘 스스로 항복하게 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앗수르가 남유다를 조롱하고 비웃었지만,
실제로는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탄원한 남유다에 의해 그들이 조롱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작정하셨고 그 일이 일어나게 하셨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기도하라고 요구하셨고
그가 기도하자 즉각 들어주셨다.

그러나 국난을 극복하자마자 히스기야 개인에게 질병이 닥쳤다.
그것은 치명적인 상처였고 죽을병이었다.

히스기야는 바로 그때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제대로 배웠고 범사에 ─모든 일에─ 기도한 것이다.
그는 “죽고 살지 못하리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듣고도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통곡하면서 애원했다.

만일 히스기야가 선지자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뜻으로 확인하여
이제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유다를 계속 보호하시기를 간구했다 해도,
그를 믿음이 부족하거나 부정적이고 소극적이며 수동적인 자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믿고 그에 대비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진실한 태도다.

그러나 본문에서와 같이 히스기야가 선지자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통곡하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 또한 믿음이다.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자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도 성도의 믿음이요,
생명을 더 연장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것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나아와 아뢰는 모든 말을 들으셨다.
그때 히스기야가 눈물을 흘리는 것도 보셨다.
이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하나님은 성도의 통곡을 들으시며 그의 눈물을 보신다.
하나님이 못 듣고 못 보시는 기도는 없다.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보신 것 자체가 응답이다.
하나님은 실제로 ‘내가 들었고 보았다’고 응답하셨다.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이 이상이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의 사정)를 아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도통 무슨 일인지 모르고 있다가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니까 그제야 이게 무슨 일이지 하고
비상대책위원회를 소집하는 분이 아니다.
이미 모든 것을 아시고, 성도의 기도를 귀로 들으시고 그의 눈물을 눈으로 보신다.
이것이 이미 응답이다.
응답 없는 기도는 없다.
즉 하나님이 못 들으시는 기도는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응답에 대한 우리의 정의는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해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분명 내 기도 소리를 들으시고 내 기도의 내용을 아시는대도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내 요구가 이뤄져야만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것으로 여기고 기뻐한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그러한 긍휼까지 베푸셨다.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실 뿐 아니라
내 소원을 이뤄주시는 여부는 내게 달려 있지 않다.
어떤 비결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바와 같이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것이 기도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으로서 히스기야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하신다.
그의 재위 14년 때이므로 그는 갑절의 기간을 선물로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은혜를 베푸셨다.

나는 연약하여 늘 내가 잘 되기를 바라고 이것을 간구하지만,
사실 내가 하나님께 드릴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