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13:1-13, 또)

북이스라엘, 아니 사실은 전체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는
사사시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직접 세우시는
─즉 누가 될지를 전혀 예측할 수 없고, 대를 물리지도 않아 안정되어 보이지도 않는─
사사제도에 대해 불신하고
다른 나라와 같이 왕을 세우게 해달라고 요구하여 왕국이 되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북이스라엘은 특히 더하였는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이전에 죄를 지었던 조상들의 “죄를 따라가고 거기서 떠나지 아니하”자
하나님께서 “노하사”
주변의 원수들─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의 나라들─의 “손에 넘기셨”다.
그러면 적국들의 “학대” 아래 “여호와께 간구하”고
이 부르짖음을 “여호와께서 들으셨”으며
“구원자를 이스라엘에게 주시매”
원수들의 “손에서 벗어나 전과 같이 자기 장막에 거하”게 된다.
그러나 범죄와 악행 → 하나님의 진노 → 원수들의 손에 넘어감 → 학대 아래 간구 → 하나님의 들으심 → 구원자를 통한 구원,
이러한 주기로만 끝나지 않았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아주 어리석고 비극적인 단어가 하나 더 붙는다.
바로 “또”라는 단어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이스라엘은 이제는 정신을 차리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전히 죄 “안에서 따라 행하며”
“또” 우상숭배에 빠진다.(“또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그냥 두었”다.)

이 비극적인 순환과 반복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또”다.
이스라엘은 “또” 죄를 지었다.
“또” 우상을 숭배했다.
그리고 이것을 대를 거듭하여 반복했다.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한 일을 그의 아들 요아스가 “또” 한 것이다.
여호아하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가고 거기서 떠나지 아니”한 것과 똑같이
요아스도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 가운데 행하였”다!

즉 앞에서 요약한 범죄 → 하나님의 진노 → 원수로부터 학대 → 간구 → 하나님의 구원에 이어 → “또” 다시 범죄로 이어진다.
그러면 그 뒤의 과정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 그러면 어차피 범죄의 결과가 다시 구원이네, 하고 안심할 수 있는 과정인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이것은 “또”로 이어져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나며,
다시 간구하여 구원을 받지만 결국 “또” 범죄하여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다.
이 연결고리가 끊어져야만 한다.
언제? 지금!
어디서? 여기서!
이것이 오늘 내가 사는 의미다.